[한창완·박인하의 만화는 시대다] 당대 독자들이 공감하는 감정을 능숙하게 담아내다

1980년대 출판만화계에 혜성처럼 등장한 강경옥은 단숨에 주목받는 만화가의 반열에 오른다. 그는 신데렐라 여주인공이 등장하거나 역사적 소재에 치우쳐있던 당시 여성만화 흐름에서 벗어나 10대 여학생들의 감정을 섬세하게 그려낸 수작들을 여럿 선보였다. 사진은 그의 대표작 ‘설희’. 작가 제공
 
작가 본인 사진. 네이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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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0월 여러 온라인 플랫폼에 ‘설희’ 마지막 화인 131화가 업데이트됐다. ‘설희’는 여자 주인공 설희와 아이돌 연습생인 남자 주인공 세이, 설희에게 반한 미국 톱스타 마커스가 서브 남자 주인공으로 등장하며 형성되는 삼각관계를 그린다. 얼핏 뻔한 로맨스로 보이지만 ‘외계인’ ‘불로불사’ ‘환생’과 같은 독특한 설정이 등장한다. 400년 전 설희가 19세 때 UFO가 조선에 불시착해 설희 가족이 다치게 된다. 외계인은 설희 가족에게 자신의 피를 수혈한다. 다른 가족은 외계인의 피에 적응 못하고 죽지만, 설희는 늙지 않고 죽지도 않는다.

세이는 400년 전 조선에서 위험에 빠진 설희를 구해준 인물이다. 설희와 세이 두 사람의 인연은 ‘400년’이라는 압도적인 시간의 흐름을 타고 오늘로 이어진다. 둘의 감정은 불로불사와 환생과 같은 SF 판타지 설정과 만나 더 섬세하게 조각된다.

강경옥(55·사진) 작가는 이처럼 누구보다 섬세하게 사람의 감정을 찾아내고 드러낸다. 이를 위해 SF와 판타지적 설정을 주로 활용하며 주인공의 1인칭 내레이션을 즐겨 사용한다. ‘설희’에서 등장하는 판타지 설정은 400년이라는 시간과 함께 설희와 세이를 묶는다. “한 번도 원한 적이 없는 이 세계에서/ 백 년은 살아야겠지/ 미치지 않고서 그럴 자신이 있겠니”(김소연 ‘편향나무’ 중)라며 삶의 무게를 고백한 시인처럼, 짐작하기 어려운 시간의 무게를 사랑으로 묶어내는 강경옥의 작품은 늘 강한 울림을 만든다.

삶을 섬세하게 조각하다

강경옥은 1983년 고등학교 시절 만화 동아리 PAC를 만들어 초대 회장에 취임한다. PAC는 이강주 박희정 유시진 나예리 이태행 김준범 등 이후 1990년대 잡지-단행본 만화 부흥기를 끌어간 작가들이 활동한 전설적인 만화 동아리다. PAC의 등장으로 함께 만화를 배우고 그리는 동아리 활동이 점차 확대됐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강경옥은 ‘달려라 하니’로 유명한 이진주 문하에서 1년 정도 문하생 생활을 했지만, PAC 활동을 통해 만화 스타일을 다듬었다. 그는 1985년 잡지 ‘여학생’에서 ‘현재진행형ing’로 데뷔한 이후 1986년 도서출판 프린스에서 ‘이 카드입니까?’를 발표하며 곧바로 주목받는 작가가 된다.

이후 ‘하이센스’에 연재한 ‘17세의 나레이션’(1989), ‘댕기’에 연재한 ‘스타가 되고 싶어’(1992)는 10대 여학생들의 생활감 넘치는 일상에서 벌어지는 우정과 사랑 같은 미묘한 감정을 섬세하게 담은 작품이다. 한국에서 여성만화는 1970년대 후반 TV에서 애니메이션으로 방영된 ‘캔디 캔디’, 그리고 불법 번안돼 잡지에 연재되거나 단행본으로 출간된 ‘유리의 성’ ‘남녀공학’ ‘베르사이유의 장미’ 같은 일본만화의 인기를 기반으로 생태계가 만들어졌다.

1970년대 후반에서 1980년대에 소개된 일본 만화나 황미나 신일숙 김혜린 김진 등의 여성만화는 역사적 격변기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대하 드라마가 많았다. 로맨스 장르는 ‘할리퀸 로맨스’처럼 신데렐라 여주인공을 다룬 작품이나, 당시 일본만화에서 유행한 발레나 피겨스케이팅 같은 여성적 소재를 다룬 작품이 주류를 이뤘다. 반면 강경옥은 당대 10대 여학생들의 일상의 단면을 정교하게 조각했다. 10대 여학생들은 자신의 감정이 그대로 드러난 새로운 만화에 환호했다.

‘스타가 되고 싶어’는 다른 여자 친구들에게 멋진 이성으로 대접받는 선우가 주인공이다. 도입부에서는 선우와 상우가 우연히 극장에서 만나고 미팅까지 한다. 선우는 이성 친구를 사귀고 싶은 마음보다 또래 여자아이들의 숭배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마음이 더 강하다. 상우는 이런 선우를 이해하고 도움을 주려고 한다. 주인공 선우와 그런 선우를 도와주려는 상우, 그리고 선우에게 집착하는 서희를 중심으로 일상의 자잘한 사건들과 10대의 미묘한 감정들이 섬세하게 묘사된다. ‘현재진행형ing’ ‘이 카드입니까?’ ‘17세의 나레이션’ ‘스타가 되고 싶어’는 그리스에서 벌어지는 비극, 유럽 왕족의 치열한 암투, 프랑스 혁명 같은 역사적 격변이나 기숙학교 등 독특한 공간에서 벌어지는 여성만화를 그저 ‘우리가 사는 이곳’에서 벌어지는 ‘우리 이야기’로 바꿔놓았다.

‘일상’에서 ‘존재’에 대한 탐구까지

강경옥을 대표하는, 아니 1980년대 한국 SF 만화를 대표하는 작품은 1987년부터 1990년까지 4년에 걸쳐 만화방 단행본 21권으로 완간한 ‘별빛속에’다. ‘별빛속에’는 주인공 신혜(시이라젠느)와 신혜의 집에 살게 된 레디온, 사라의 삼각 구도로 시작된다. 처음에는 부담 없는 로맨스 장르처럼 보였다. 그런데 우주선이 신혜의 집 근처에 불시착하고, 사라가 자신이 외계인이라는 걸 밝힌 후 신혜가 아르만에게 납치되고, 신혜의 가족이 살해당하는 등 이야기가 급속도로 전개된다. 평범한 듯 보였던 로맨스가 어느새 지구 존립문제로 넘어간다.

외계 왕국 카피온의 제1왕녀 시이라젠느가 신혜였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신혜는 레디온과 함께 카피온으로 떠나게 되면서는 개인에서 지구로, 다시 우주로 고민 영역이 급격히 확장된다. 카피온에 간 신혜는 왕족이 가져야 하는 초능력을 자각하지 못해 괴로워하다가 여왕과 신을 대면하는 성역으로 떠난다. 작품은 개인에서 지구, 우주를 거쳐 신의 영역까지 확장되지만, 수많은 질문을 던지고 받고 대답해야 하는 건 오롯이 신혜다. 결국 신혜는 끊임없이 스스로 되묻는다.

“아아, 나는 무엇인가…. 나는 무엇 때문에 존재하는 건가. 내가 이렇게 살아야 할 이유는 무엇이지? 나의 진짜 삶의 목적은?” “내가 느끼고 내가 생각하고 내가 내린 결론 내린 그 모든 것이 신이 정해 놓았다고 말하는 것인가.”

시이라젠느가 된 신혜에게 가장 큰 고통은 평범한 지구인 소녀 신혜의 삶이 송두리째 부정되는 ‘존재’의 문제다. 앞선 작품들에서 10대 여학생들이 나와 친구와 관계 속에서 존재에 대해 고민했다면, ‘별빛속에’의 신혜는 존재에 대한 철학적 질문을 던지게 된 것이다. 일상에서 분리된 10대 여학생 신혜는 시련을 겪고 자신에게 계속 질문하고 고민하다, 마침내 지구와 연결된 카피온의 안정과 평화를 위한 헌신으로 나아간다.

“그것은/ 인간 최대의 약점 또는/ 최대의 강점/ 몇 년 몇백 년 몇천 년이 흘러도/ 단지/ 단지 사랑하고 있었다는 사실 하나만은/ 절대로 잊지 않는 것.”

신혜가 카피온을 파괴할 거대한 폭발물인 우주선 사만호를 혼자 힘으로 끌고 블랙홀로 가면서 레디온과 함께 한 마지막 자리에서 흘러나오는 내레이션이다. 강경옥은 존재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답을 찾는 과정을 다양한 장르 안에 녹였다.

‘라비헴폴리스’(1989) ‘노말시티’(1993) ‘설희’ 역시 SF를 메인 장르로 드라마와 로맨스를 결합해 존재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1999년 만화잡지 ‘케이크’에 연재를 시작한 ‘두 사람이다’는 오컬트 장르다. 1999년 서울, 여학생 한지나의 집에 미국에 살던 사촌 명현과 친구 이유진이 온다. 친척 모임이 있던 날 무당이 방문해 사주를 본 뒤 지나의 아버지에게 자손 중에 피해자가 나올 것이라는 말을 한다. 지나는 자신의 집안이 저주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어느 날 지나의 엄마가 지나를 죽이려 하지만 엄마는 그 순간을 기억 못한다. 지나는 자신을 죽이려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두려워한다. 전 작품들이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던졌다면, 이 작품은 ‘내가 나인 줄 아니?’라는 괴담 속 질문을 빌린다. 존재에 대한 고민을 개인의 내면에 던진 전작들과 달리 ‘두 사람이다’는 존재에 대한 ‘의심’을 다룬다. 존재에 대한 의심은 내면의 문제와 정체성의 문제로 시작해 궁극에는 인간과 존재, 세계의 문제로 향한다.

강경옥은 일상의 평범한 이야기 안에 당대 독자들이 공감하는 감정을 능숙하게 담아내고, 그것을 조율한다. 인간과 사회에서 우주로 확장되는 다양한 고민을 개인의 감정과 맞물린 SF, 존재를 의심하는 오컬트 장르에 이르는 다양한 스토리 변용을 통해 풀어낸다. 그래서 많은 독자가 여전히 강경옥의 신작을 기다린다.

<박인하 청강문화산업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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