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독역사여행] 한국교회 첫 여성목사, 회개의 신앙을 외치다

신사참배 거부 ‘출옥 성도’ 최덕지 목사가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절이었다”고 한 경남 고성 은월리교회 현재 모습. 통영 충무교회에서 기독교 교육을 받았던 최덕지는 도쿄 유학생 남편을 맞아 은월리 시댁 방 한 칸에 가정 제단을 마련한다. 은월리교회 시작이었다. 예장 재건 측은 출옥 성도 중심의 신앙의 순수성을 강조하는 교파다. 아래 사진은 1960~70년대 예배당.



 
통영 충무교회와 시내가 보인다. 왼쪽 삼도수군통제사 건물(한옥) 부근이 최덕지 생가였다.
 
통영 기독교 사립 진명유치원 교사 시절 최덕지(맨 뒤 왼쪽부터 세 번째). 1931년 3월 19일 촬영됐다.
 
최덕지 (1901~1956)
 
1945년 8월 17일 평양형무소 출옥 직후 ‘출옥 성도’와 함께 찍은 사진. 첫줄 맨 왼쪽이 최덕지 목사.
 
경남 고성 상족암 바다. 경남 선교는 호주선교부가 교통이 편한 해안을 중심으로 펼쳤다.


‘타협하는 용서’. 그래서 용서받은 자가 큰소리치는 모순을 선뜻 이해하기 어렵다. 일제강점기 친일파가 그랬다. 천황에 절하던 신앙인들이 그랬다. 죄인들은 죄 씻김 받은 줄 안다. “내가 뭐 어때서, 그땐 다 그랬어”라며 자기합리화를 거쳐 도리어 반격까지 한다. 진심으로 회개하지 않는다. 어설픈 용서, 타협했던 용서가 뼈아프다. 우리는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갈 6:1)라는 말씀이 두려웠던 걸까.

그는 타협하는 용서가 없었다. ‘하나님의 충복’으로 불리는 최덕지 목사 얘기다. 눈물의 애국자 예레미야와 같은 기도의 신앙인이었을 뿐이다. 최덕지는 일제강점기 재판정에 들어가서도 기도했다. 판사가 그의 기도가 끝나길 기다렸다 진행했을 정도다. “진정한 왕은 하나님 한 분뿐인데 우리 민족을 속박하는 일본 왕에게 절할 수 없다.” 그가 ‘옥중 성도’가 된 이유다.

지난주 경남 고성군 거류면 은월리. 고성읍 내에서 5㎞ 떨어진 한적한 시골 마을이다. 그곳에 한눈에 봐도 미자립교회인 ‘은월리교회’가 봄빛을 받고 있다. 값싼 건축재료 샌드위치 판넬로 예배당을 보강했다. 정문에는 교회 간판 세우기도 여의치 않았던지 현수막으로 ‘대한예수교장로회 은월리재건교회’라고 내걸었다.

최덕지가 태어난 경남 통영은 일본 수산자본 진출과 호주 선교사들의 선교로 개화가 빨랐다. 그는 조부모와 어머니가 대화정교회(현 충무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했기 때문에 기독신여성으로 성장해 갔다. 어머니가 교회 출석한다며 곰방대로 손을 때려 상처를 입혔던 아버지도 곧 예수를 믿게 됐다. 그의 집은 이순신 장군이 초대 통제사를 했던 삼도수군통제사 관아 옆이었다. 최덕지는 통영 미션스쿨 진명학교와 마산 의신학교를 졸업했다. 그리고 통영 진명유치원 교사가 됐다. 열아홉 나이였다.

1919년 3월 만세운동이 전국을 휩쓸었다. 의신학교는 최덕지의 스승인 박순천(1898~1983·정치인)을 중심으로 구마산 장날 만세시위가 있었다. 최덕지는 박순천의 집에서 하숙하며 철저한 항일정신을 배웠다. 훗날 ‘통영 애국부인회’, ‘상해독립단 통영 원조회’ 활동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어린이전도상을 자주 탔고 1922년 집사가 됐고 이어 여전도회장이 됐다. ‘오직 믿음, 오직 독립’ 정신으로 살아갔다. 출가용 장롱과 의복을 팔아 군자금으로 내놓기도 했다. 1925년에는 통영 기독교청년회장을 맡기도 했다.

“우리나라가 독립하려면 여자도 배워야 합니다. 월사금(수업료)은 없으니 누구든 배우러 오세요.”

‘들녘에 비바람 불어와서/ 산 위에 나무들 무너져도/ 오늘은 이 동산 꾸며놓고/ 내일은 저 동산 꾸며놓자.’ 이런 노래로 한글 산수 역사 등을 가르치며 신앙심과 애국심을 불어 넣었다.

그는 통영 근우회, 통영 신간회 등으로 활동 폭을 넓히고 여성 차별, 미신타파 등에 앞장섰다. 황신덕 최은희 공덕귀 등 근대여성 인물들과 함께였다. 그러나 1927년 성탄절. 교세가 성장한 한국교회는 일제의 ‘대정 천황붕어일(일왕 사망일)’ 근신 명령에 일제히 동조해 성탄절 새벽송을 돌지 않았다. 최덕지는 기도 중 사단의 먹구름을 느꼈다. 교회가 병들어 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 불안함은 끝내 ‘미션스쿨 성경교육 금지’ ‘일본 국기 배례’ ‘천조대신 우상당 건립’ ‘동방요배’ ‘순국선열에 대한 묵도’ 등으로 나타났다. 그는 금식기도에 들어갔다.

30대에 평양여자신학교에 진학한 최덕지는 ‘금신상에 절하지 아니’(단 3:18)하며 다니엘과 같이 승리하리라 확신했다. 그렇게 신학교를 졸업하고 경남 진주 경남여자성경학교 교사가 됐다. 하지만 그 무렵 한국의 모든 교회에 신사참배 강요가 이어졌다. 교회가 무릎을 꿇었고, 학교가 강제 폐쇄됐다. 최덕지는 “신사참배는 십계명 1, 2계명 위반”이라고 가르쳤다. 1939년 경남권에서 최덕지 한상동 조수옥 주남선 최상림 이현속 염애나 등이 신사참배 반대 운동을 주도해 나갔다. 검속이 이어졌다. 대개의 사역자와 성도가 신사참배는 ‘국가의례’라 정신 승리하며 훼절했다.

경찰서를 수시로 드나들던 최덕지는 1941년 1월 조선인 형사에 의해 구속돼 1945년 8월 17일 평양형무소에서 출옥했다. 이날 최후까지 살아남은 14인 중 12인이 한국교회사 최고의 명장면 ‘출옥 성도 예배 후 기념 사진’을 찍었다. 하나님 뜻 안에서 완전한 승리였다. 이 항일투사이자 선지자는 고향에 돌아와 제단을 쌓고 예배를 드렸다. 그러나 해방 후 기독교 지도자들은 신사참배의 죄악을 회개치 않았다. 악의 세력은 여전히 강했고 최덕지는 그들을 꾸짖으며 진정으로 회개하는 신앙 운동이 필요하다고 외쳤다. 조선예수교장로회 경남노회의 회개 신앙 운동은 출옥 성도들을 중심으로 ‘고신’ ‘재건’파 등으로 분리됐다.

이후 최덕지는 재건 노선을 주도하며 철두철미한 회개 속에 교회를 이끌었고, 공산주의에 신앙으로 맞섰다. 그리고 최덕지는 1951년 4월 3일 한국교회 첫 여성 목사가 됐다. 그리고 부산재건교회에 부임한 최덕지는 1956년 5월 13일 평양형무소에서 얻은 질병이 악화해 지상에서의 삶을 마감했다.

“어머니는 은월리 결혼생활 때가 가장 행복했다고 하셨습니다.”

유일한 혈육 김혜수(1924~1994)가 남긴 말이다. 고성 출신 도쿄유학생 김정도와 결혼한 최덕지는 은월리교회 영수 시아버지를 비롯한 시댁 식구들과 유학 마치고 돌아올 남편을 기다리며 그곳에서 예수를 섬겼다. 한데 막 태어난 딸을 두고 남편이 장티푸스로 죽고 말았다. 결혼한 지 두 해 만이었다.

그 집터는 가정제단에서 현재 설립 100년의 조직교회가 됐다. 1974년 이곳으로 시집온 신영희 권사는 “최덕지 목사의 시동생 김정윤 목사가 남편과 친구였는데 이분들이 교회를 지켜왔다”면서 “하나님 뜻이 있으시겠지만 과연 우리 다음 대에 교회가 이어질 수 있을까 걱정도 된다”고 말했다. 한국 농촌 교회와 신앙의 절개를 지키며 살아온 이들 앞에 펼쳐진 현실이다.

고성=글·사진 전정희 선임기자 겸 논설위원 jhjeo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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