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 in 이건희 컬렉션] 사실묘사와 반구상… 이병철 회장이 인정한 ‘두 개의 작품 세계’

국가에 기증돼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이건희컬렉션 특별전 한국미술명작’전에 나온 박항섭 작 ‘가을’(1966, 캔버스에 유채, 145×112.5㎝). 구상적인 형태 묘사를 기본으로 하면서도 인체를 길게 변형함으로써 환상적인 화면을 구사했다. 삼성 창업주 이병철 회장이 작가로부터 구입해 아들 이건희에게 상속한 작품이다.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이병철 회장이 주문해 한때 중앙일보 로비에 걸어뒀던 박항섭 작 ‘금강산과 팔선녀’(1974·캔버스에 유채, 191×320㎝),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기존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으로 박항섭 특유의 문학적이면서 초현실적인 느낌이 물씬 나는 ‘마술사의 여행’(1977, 캔버스에 유채, 63×73㎝).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지난해 가을 K옥션 경매에 독특한 그림 두 점이 나왔다. 금강산 설화를 소재로 한 유화 ‘금강산과 팔선녀’(1974, 191×320㎝)와 ‘선녀와 나무꾼’(1975, 261.5×196.5㎝)이다. 각각 300호, 200호 대작이다. 작품은 속살이 살짝 비치는 얇은 흰옷, 푸른 물이 반사된 피부, 계곡물이 소용돌이치는 기암괴석, 날개를 대신하는 옷의 너풀거림 등 디테일에서 예사롭지 않은 솜씨를 보여주지만 요즘 미감과 달라서였을까, 유찰됐다. 표정이 연극적일 만큼 아리따워 북한의 리얼리즘 미술을 떠올리게 하는 두 작품을 70년대에 그린 작가는 박항섭(1923∼1979·아래 사진)이다.

우리가 기억하는 그는 ‘추상화’로 잘못 불릴 만큼 반구상적인 작품을 그렸다. 뼈만 앙상하게 남은 물고기를 맷돌질하는 여인보다 큼지막하게 병치하는 식의 설화적인 그림으로 근원적 향수를 건드리는 작업을 했다. “명암 효과를 통해 닮게 그리는 일은 사진술에나 맡기라”고 했던 그가 사진보다 더 사진 같은 금강산 연작을 남겼다니 당혹스러울 정도다. 이는 주문자의 취향대로 그렸기 때문이다.

주문자는 그 시절 최대 컬렉터였던 삼성 창업주 이병철 회장이다. 그가 가장 좋아한 세 명의 생존 화가는 한국화에서 이당 김은호, 서양화에서 박항섭 문학진이었다고 한다. 셋은 데생력에서 당대 최고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신라호텔과 안양컨트리클럽, 중앙일보사 등 삼성 관련 건물에 이들의 작품이 걸렸다. 박항섭의 ‘금강산과 팔선녀’도 중앙일보사 로비에 걸렸다. 금강산을 좋아했던 이 회장은 ‘금강산도’(500호) 1점을 추가해 금강산 그림 3종 세트를 주문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 가운데 위 2점이 삼성생명 소유로 넘어가 지난해 경매에 나왔다.

이 회장은 작가의 스타일대로 그린 작품도 구입했다. 그중 하나가 아들 이건희 회장에 상속돼 ‘이건희 컬렉션’에 포함됐다가 국가에 기증된 ‘가을’(1966, 캔버스에 유채, 145×112.5㎝)이다.

작가는 59년에 동명의 작품을 그렸다. 제8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에서 특선을 했는데, 이건희 컬렉션과 구도가 비슷하다. 59년 작에선 치마만 입은 반라의 여인 셋이 바구니와 항아리를 인 채 맨발로 숲길을 걷고 앳된 여아가 호기심어린 눈으로 이들을 바라본다. 여인들의 동양적인 몸매에서 향토적 정서와 고갱의 타이티 여인 같은 원시적 건강미가 동시에 느껴진다. 66년 작에선 여인들의 신체 비례가 길어져 이국적인 느낌을 준다. 배경의 나무도 거의 없애버려 벽화 같다.

박항섭은 황해도 장연군에서 기독교 가정의 4남 4녀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났다. 장로였던 부친은 일제강점기 민선 도평의원을 지내고 유치원을 세운 개화인이었다. 박항섭은 해주공립보통학교 시절 미술에 두각을 나타내 조선일보 주최 중미전에 입선했다. 17세 때인 40년에는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할 정도로 미술에 관심을 가졌고 이듬해인 41년 보통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일본 도쿄로 가서 가와바타미술학교에서 공부했다. 이곳은 동경미술학교에 입학하려는 학생들이 거쳐 가는 사설 미술학원 같은 곳이다. 병약했던 그는 43년 건성늑막염에 걸려 중도 귀국하고 과수원이 있는 고향집에서 지냈다. 아버지가 세운 중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47년에 결혼하는 등 안정적 생활을 꾸렸지만 6·25전쟁이 터지자 1·4후퇴 때 부모형제를 북에 두고 아내와 함께 남하했다. 고향에 대한 근원적 그리움은 평생의 작품 세계를 지배하는 주제가 된다.

그는 53년 국전에서 처음 입선한다. 이후 내리 당선되며 61년 추천작가 반열에 오른다. 60년대 들어 박항섭의 작품세계는 원근법과 명암법을 사용해 닮게 그리는 재현과 점점 멀어진다. 당시 유행하던 추상으로 가진 않았다. 60년부터 미술계에서 국전 중심의 구상 회화에 반발해 추상표현주의의 열기가 분출했지만, 그는 시류와 상관없이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한다.

“화면은 감정의 쓰레기통이 아니다. 감정은 정리돼야 하며 감정을 잘 요리할 수 있는 이지(理智)가 필요하다.”

이렇게 말하는 그에게서 선과 색은 재현의 수단이 아니다. 여인, 물고기, 돌, 아이 등 그림 속 대상은 원근법을 무시한 채 서로 병치돼 있다. 선사시대 암각화에 선으로 새긴 그림처럼 말이다. 흑갈색 적갈색 황갈색 회청색 등 가라앉은 색상은 바닥 모를 깊이나 그리움의 정서, 원시의 생명에 대한 동경을 드러낸다. 박항섭의 예술에는 생명성과 설화성, 원시성과 문학성이 듬뿍 들어 있다는 평가가 따라다니는 이유다.

초기 어두운 색상과 두꺼운 마티에르가 지배하던 캔버스 화면은 70년대부터 다소 밝아진다. 한 비평가는 박항섭의 작품 세계를 “충동적 표현보다는 해체와 종합의 조형적 과정을 거쳐 시대적 미의식을 표현하는 차분한 작업”이라고 해석했다.

그는 지속적으로 국전에 작품을 출품했다. 71년 국전에서 추천작가상을 받은 덕분에 해외시찰 특전이 주어져 73년 말에서 74년 초 6개월간 파리 등 유럽을 다녀왔다. 개인전을 열면서도 창작미술가협회, 구상전 등 그룹전에도 참여하며 왕성하게 활동했다.

그렇게 의욕에 넘쳐 작품 활동을 하던 79년 3월의 어느 날, 작업에 몰두하던 중 캔버스 앞에서 쓰러졌다. 그러곤 영영 돌아오지 못했다. 그의 나이 56세였다. 당장 4월의 신세계화랑 그룹전 등 여러 전시가 대기 중인 상황이었다.

때 이른 죽음은 삶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서가 아닐까. 그는 창작에 몰두하겠다며 60년 6월에 5년 넘게 다니던 한양공업고등학교 미술교사 자리를 그만뒀다. 1남 3녀를 둔 가장인데 말이다. ‘최초의 전업 작가’라는 타이틀이 붙었지만 그림을 팔아 가장의 책무를 다하는 건 쉽지 않았을 것이다.

미술시장이 제대로 형성되지 않은 시절이었다. 박정희정권이 주문했던 민족기록화나 미술애호 기업인의 구매가 그나마 도움이 됐을 것이다. 민족기록화는 경제 건설이나 역사적 주제 등 정권이 주문한 주제를 리얼리즘 기법으로 그린다. 박항섭이 67년 수주한, 1·4후퇴 때 폭파된 대동강 철교를 건너는 피난민 그림은 1000호 초대형 작품이다. 현재 국방부에서 소장하고 있다. 신진자동차, 당인리발전소, 안시성싸움 등 여러 기록화에서 그가 보여준 탁월한 묘사력은 이병철 회장의 귀에도 들어갔을 테다. 공식 미술 교육이 가와바타미술학교 6개월 남짓이 전부임을 감안하면 그가 했을 부단한 노력이 상상이 간다. 금강산을 그릴 때는 직접 보지 않은 금강산을 제대로 표현하기 위해 일제강점기 금강산 엽서를 구하고 금강산 바위를 닮은 돌까지 구했다.

생계를 위한 그림과 박항섭 식 그림. 두 세계는 간극이 너무 크다. 쌍두마차를 끌고 가기엔 힘에 부쳤을까. 이병철 회장의 컬렉션이 그런 삶을 증거하는 것 같다.

손영옥 문화전문기자 yosoh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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