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 in 이건희 컬렉션] 파리 근처 농촌 서민의 삶 묘사… 모네·르누아르와 인상주의 주도

국가에 기증된 이건희 컬렉션으로 인상주의 화가 카미유 피사로가 그린 ‘퐁투아즈 시장’(59×52㎝, 1893). 피사로는 55세에 신인상주의 화가인 쇠라를 만나 그의 점묘법을 수용하며 변화를 꾀하던 시기에 이 그림을 그렸다. 아래는 같은 기법으로 그린 ‘수확’(1887).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위키피디아





 
전형적인 인상주의 화풍을 보여주는 ‘과수원’(1872).
 
점묘법을 거쳐 인상주의로 돌아온 시기에 그린 ‘비오는 날의 루앙 보이엘디외 다리’(1896).


그는 순정파 화가였다. 하녀 줄리에게 반해 30세(1860)에 동거했다. 둘은 아이를 줄줄이 낳고 함께 산 지 11년이 돼서야 결혼식을 올렸다. 그림이 잘 팔리는 화가는 아니었다. 화공처럼 유리창에 그림을 그려주고 돈을 벌곤 했다. 너무 힘들어 도자기 그림이라도 그려야 하나, 고민한 시기도 있었다. 더욱이 55세 늦은 나이에 화풍을 확 바꿔 버리는 바람에 생계에 위협을 느꼈고, 여섯 아이를 부양해야 했던 아내는 견디다 못해 아이들과 강물에 뛰어들 생각까지 했다고 한다.

국가에 기증한 이건희 컬렉션의 하나인 이 그림, ‘퐁투아즈 시장’(1893)을 그린 화가는 카미유 피사로(1830∼1903)다. 피사로는 덴마크령 서인도제도의 세인트 토마스섬에서 태어났다. 유대계 프랑스인이던 부친은 현지에서 사업을 했고, 가업을 이을 줄 알았던 아들이 화가가 되려고 하자 반대했다. 아들이 가출하다시피 집을 나가는 등 고집을 부리자 화가가 되는 걸 허락했다.

피사로는 29세이던 1859년에야 서인도제도에서 대서양을 건너 파리로 와서 사설 아카데미인 아카데미 쉬어스에서 미술수업을 하며 본격적으로 화가의 꿈을 키웠다. 이곳에서 열 살 어린 클로드 모네(1840∼1926) 등을 만났다. 훗날 인상주의의 주역이 된 모네, 르누아르, 바지유, 기요맹 등은 아카데미 쉬어스나 샤를 글레르 같은 개인 화실을 함께 다니며 서로 어울렸다.

피사로도 화가로 출세하기 위해 밟는 코스인 정부 공모 살롱전에 출품했다. 1859년과 65년 등 몇 차례 당선되기는 했지만 주목받지는 못했다. 나중에는 살롱전을 외면했고 1874년 모네, 르누아르, 드가, 기요맹, 시슬레 등과 독립전시회를 열었다. 인상주의 전시회로 불리는 미술사의 새로운 장을 연 주역의 한 사람이 된 것이다.

피사로는 인상주의 화가이지만 이 그림이 시사하듯 소재에서 모네, 르누아르 등과 달랐다. 그들은 카페나 배 위에서 먹고 마시며 춤추는 등 도시 부르주아의 여가 문화를 그렸다. 피사로는 농촌에 눈을 돌렸다.

이건희 컬렉션의 이 그림이 담고 있는 퐁투아즈가 그 무대였다. 퐁투아즈는 그가 화가 생활을 시작한 초창기인 1866년부터 20여년간 살았던 파리 북쪽의 농촌 마을이다. 파리가 대도시로 변모하는 가운데 이곳에도 그 영향이 미쳤다. 피사로는 공장의 굴뚝 연기가 오르는 퐁투아즈의 변화하는 마을 풍경을 담았다. 1870년 무렵부터 농촌 풍경을 담으며 평화로운 전원 풍경이나 사과를 따고 이삭을 줍고 소를 모는 농부를 그렸다. ‘아, 밀레를 닮았네.’ 이 대목에서 이런 생각을 했다면 맞다. 피사로는 밀레를 ‘또 다른 자아’로 여길 만큼 자신에게 영향을 준 화가로 꼽았다. 일부 작품은 밀레를 표절했다는 시비에 휩싸일 정도였다. 하지만 밀레와 달리 피사로의 그림 속 농부는 자본주의 교환 경제에 편입된 농부였다. 그들은 시장에 가서 곡물과 채소를 팔고 가축을 사는 농부들이었다. 이 그림, ‘퐁투아즈 시장’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말이다.

피사로의 회화 세계는 도시 남녀의 근심걱정 없고 떠들썩한 순간을 빠른 붓질로 그리던 다른 인상주의 화가들처럼 화려하지는 않다. 어떤 비평가는 “시슬리의 장식적인 감정도, 모네의 환상적인 눈도 갖지 않았다”고 꼬집었다. 피사로도 알았던 모양이다. “모네와 르누아르의 빛나는 작품이 전시된 이후라서 나의 작품은 슬프고 덤덤하고 아무 광택이 없는 것으로 보일 것”이라며 우울해 할 때도 있었다.

그런 그에게 “정신성 없는 풍경, 감성 없는 풍경은 정물화나 같습니다. 부르주아의 특권을 묘사하는 모네나 시슬리를 모방하지 마십시오. 지금 당신의 방법을 게속하십시오”라고 친구이자 비평가인 뒤레는 격려했다.

인상주의에서 한계를 느낄 즈음인 1885년이었다. 55세의 그는 기요맹의 작업실에서 폴 시냑을 만났고 시냑은 그에게 조르주 쇠라(1859∼1891)를 소개했다. 요즘 ‘핫’한 작가 김선우가 패러디한 그림으로 유명한 ‘그랑드 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는 쇠라가 창시한 ‘과학적 인상주의’(신인상파)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그림이다. 신인상파의 분할주의는 컴퓨터 화면의 픽셀 원리와 같다. 서로 다른 색깔의 물감을 팔레트에서 섞는 게 아니라 캔버스에 각기 다른 색을 점을 찍듯 나열해도 우리 눈은 섞인 색으로 인지한다. 이런 광학이론을 적용해 점묘법을 창안한 것이다.

50대 중반의 중년이 된 피사로는 나이도 개의치 않고 조카뻘 되는 26세 청년 화가가 주장하는 새로운 이론에 빠졌다. 쇠라가 32세에 요절함으로써 점묘주의는 생명력이 짧았지만 이렇듯 피사로에게 영향을 미칠 정도로 미술사에 한 획을 그었다. 피사로의 이 그림 ‘퐁투아즈 시장’에는 피사로가 50대 후반에 받아들인 신인상주의 점묘법의 흔적이 진하게 남아있다. 붓의 터치는 섬세하고 작아졌으며 덕분에 온화한 분위기를 낸다. 좌판에 앉아 곡물을 파는 아낙, 흥정하는 양복 입은 아저씨, 장을 보러 온 허리가 잘록한 아가씨 등 등장인물의 신체는 원통처럼 둥글둥글해졌다. 쇠라의 ‘그랑드 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말이다. 볕이 좋은 날인지 사람들의 얼굴 위로 쏟아지는 햇빛은 환한데 그 활기찬 순간이 급속 냉각돼 영구화된 느낌마저 든다. 모네 등 다른 인상주의 화가들의 그림에서 느껴지지 않는 이런 항구적인 느낌은 어디서 생겨나는 걸까. 피사로는 이미 1880년대부터 습작이나 유화 스케치는 야외에서 하고 작업실로 돌아와 이를 재구성하면서 작품을 완성했다. 바람이 부는 날도 캔버스가 날아가지 않게 꽁꽁 붙잡아 매고 야외에서 그림을 완성하던 모네와는 태도가 달랐다. 이들 인상주의자가 즉흥적 관찰에 의한 찰나적 순간을 기록한 것과 달리 피사로는 작업실에서 심사숙고하며 재수정했다. 자세히 보면 인물들의 테두리는 보색을 써서 윤곽선을 뚜렷이 한 것을 볼 수 있다. 그런 윤곽선이 화면에 항구적인 느낌을 부여하는 것 같다. 피사로의 점묘법은 모네나 시슬레 등 동료 인상주의 화가들의 공감을 얻지 못했다. 시장의 반응도 냉담했다.

하지만 폴 세잔(1839∼1906)은 다른 화가보다 피사로의 작품이 더 진보적이라고 생각했다. 세잔은 피사로를 만나기 위해 매일 3㎞의 먼 거리를 걸어 다닐 정도로 그를 좋아했다고 피사로의 아들 뤼시앙은 전한다. 피사로는 ‘꼰대’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세잔을 비롯해 폴 고갱(1848∼1903), 빈 센트 반 고흐(1853-1890) 등 자신보다 한참 나이가 어린 후기 인상주의 화가들과 잘 어울렸다. 이들에겐 삼촌 같은, 아버지 같은 사람이었다. 당시 부유한 금융인으로 아마추어 화가였던 고갱은 피사로의 초대를 받아 예술적 조언을 듣기도 했고 퐁투아즈에 와서 함께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화상이었던 테오 반 고흐를 통해서는 그의 형 빈센트 반 고흐를 알게 됐다. 고흐의 그림에도 나오는 의사 가셰 박사를 소개해준 이가 피사로였다. 피사로는 말년 10년에 인상주의로 돌아갔고 파리로 가서 도회풍경을 담았다.

작가에게 변신, 혹은 변신의 시도는 중요하다. 이건희 컬렉션에 있는 ‘퐁투아즈 시장’은 작가 인생 대부분을 보낸 장소인 퐁투아즈를 무대로 하고 있다는 점, 그가 인상주의에 머물지 않고 신인상주의를 수용하며 혁신을 꾀한 시기를 보여준다는 점, 농부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가하고 있는 점에서 그런 변신의 흔적이 진하게 배어있다.

손영옥 문화전문기자 yosoh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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