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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는 애들이나 보는 것? 지적 경이감을 주는 세계!”

환상문학 작가이자 장르문학 전문 편집자인 최지혜가 지난 6일 서울 여의도 국민일보 사옥에서 ‘SF 붐’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최지혜는 20년 가까이 한국 장르문학의 둥지 역할을 해온 환상문학 웹진 ‘거울’의 창립멤버이자 현재까지 운영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한영 기자


정보라 작가의 소설집 ‘저주토끼’가 영국 부커상 최종 후보에 지명된 것은 한국 장르문학 역사에서 극적인 순간이었다. 오랫동안 비주류였던 장르문학이 최근 몇 년새 시장에서 성공을 거두더니 문학성도 인정을 받았기 때문이다.

환상문학 계열의 기이한 이야기를 쓰는 정보라는 문단의 등단 절차를 밟지 않았다. 그의 작품들은 문학잡지를 통해 발표되지 못했다. 장르문학 단편을 실어주겠다는 문예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정보라는 환상문학 웹진 ‘거울’의 독자게시판에 작품을 올리며 이력을 쌓아왔다. 판타지와 호러, SF(과학소설) 등 장르문학 작품들이 발표될 공간을 제공하기 위해 2003년 창간된 ‘거울’은 독자들의 창작물도 심사해 필진으로 데뷔시켰다. 정보라 곽재식 심너울 등이 이런 경로를 통해 작가가 됐다.

한국 장르문학의 둥지 역할을 해온 ‘거울’의 창립 멤버이자 운영위원으로 활동하는 최지혜(44) 작가를 지난 6일 만났다. 그는 ‘저주토끼’가 부커상 후보에 오른 것을 “한국 장르문학의 잠재력이 폭발한 사건”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정보라 외에도 김보영 배명훈 등 한국 장르문학 작가들이 외국에 나가면 더 인정을 받을 거다, 이런 얘기를 우리끼리 많이 했다”며 “한국 장르문학 작가들의 역량은 대단하다. 그런데 그걸 평가해줄 잣대가 그동안 없었다. 부커상이 한국 장르문학을 인정해준 것”이라고 설명했다.

‘저주토끼’ 표제작은 ‘거울’이 창간 12주년을 맞아 기획한 ‘십이지신 특집’ 중 하나로 발표된 글이다. 최지혜는 정보라에 대해 “‘거울’에 한 달에 한 편씩 글을 올렸다. 굉장히 성실하고 많이 쓰고 좋은 작품을 쓰는 작가였다. 자기가 겪고 느끼고 좋아하는 이야기라면 뭐든지 다 소설로 써내는 능력이 있었다”면서 “초반에는 여자의 원한과 관련된 귀신 이야기를 많이 써서 ‘어둠의 작가’라는 별명을 지어드렸다”고 말했다.

장르문학 작가들은 오랫동안 글을 써왔어도 무명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정세랑 배명훈도 SF로 시작했지만, 정세랑이 ‘창비문학상’을 받고 배명훈이 ‘젊은 작가상’을 받은 뒤에야 이름이 알려졌다. SF작가라는 이름표를 달고 문학 시장에서 베스트셀러에 진입한 경우는 2019년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을 낸 김초엽이 처음이다.

최지혜는 “문단이 SF를 인정하지 않았다”면서 “등단하려면 쓰는 장르가 제한된다”고 말했다. “순문학과 SF는 중점을 두는 부분, 인물 묘사 방식, 글의 밀도까지 굉장히 다르다. 이쪽(SF) 단편을 그쪽(순문학)에서 읽으면 못 썼다고 한다. 여기서는 새로운 소재랑 발상, 세계가 중요한데 저쪽에서는 왜 인물 묘사가 허술하냐, 이런 식이다.”

최지혜는 1990년대 ‘거울’의 모태인 PC통신 판타지동호회부터 활동했으니 한국 장르문학의 역사를 지켜봤다고 할 수 있다. 그는 환상문학 작가이자 장르문학 전문 편집자, 장르문학상 심사위원이다. 대학에서 웹소설 창작도 가르친다. 그는 2013년 소설가 장강명(당시 동아일보 기자)과 인터뷰하면서 “한국에서 SF·판타지를 좋아하면 이유 없이 소수자 취급을 받아요. 차라리 도박을 좋아한다고 말하는 게 더 쉬울 것 같아요”라고 말한 적이 있다. 지금은 어떨까.

“오히려 반대인 것 같다. 요즘은 ‘SF 코인’을 탄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예전에는 SF 작품을 순문학이나 추리소설이라고 이름을 붙여 내곤 했는데, 지금은 SF가 아닌 것 같은 작품들도 SF 이름을 달고 나온다.”

실제로 최근 몇 년간 SF는 한국문학에서 가장 뜨거운 장르였다. 정세랑 김초엽 천선란 김보영 정보라까지. SF에서 출발한 작가들이 문학시장을 주도하고 있다. SF 전문 출판사들이 생기고 젊은 작가들이 앞다투어 SF 창작에 뛰어들고 있다. 스타 작가 김영하의 첫 SF 소설 ‘작별인사’는 한 달째 베스트셀러 1위를 기록 중이다.

최지혜는 “작가들의 체감이 달라진 건 요 몇 년”이라며 “SF 작가들의 숫자가 많아지고 배경도 다양해졌다. 출판사가 계약하자고 작가들을 찾아오는 것도 큰 변화다. 예전에는 우리가 원고 뭉치 들고 가서 책 좀 내달라고 간청하고 거절당하고 그랬다. 그래서 자비로 책을 내고 제발 300부만 팔렸으면 좋겠다고 기도하곤 했다”고 했다.

그는 SF 붐은 앞으로 더 커질 것이라고 전망한다. “영상에서도 책에서도 SF나 판타지가 많이 늘었다. 특히 청소년물에서 두드러진다. 도깨비의 딸이 주인공이거나 마법학교에 가고 귀신 보는 아이가 나오는 작품들이 1등을 한다. ‘헝거게임’ ‘오징어게임’ 등 미래 생존 게임이나 좀비물도 유행이고. 웹소설도 대부분이 장르문학이다. 순문학은 거의 없다. 이런 게 청소년 콘텐츠의 핵심이 되고 있다. 애들이 이런 걸 보고 자란다.”

장르문학은 아주 좋아하는 사람과 아예 안 보는 사람으로 갈린다고 한다. 그런데 지금 자라는 아이들에게는 장르문학에 대한 거리감이 없다. 어렸을 때부터 서사물을 많이 접해 웬만한 이야기는 진부하게 느낀다. 순문학의 느린 속도도 견디지 못한다. 중학생 때 ‘반지의 제왕’을 본 후 SF 덕질을 시작했다는 최지혜는 “나는 순문학은 못 읽는다. 답답하다”고 했다.

“순문학은 인간 탐구 위주, 묘사 위주다. 장르문학 독자들은 섬세한 것보다 사건이 많은 걸 좋아한다. 사건이 많고 세계에 더 중점이 간 작품, 우리가 사는 세계와 다른 물리법칙이나 가치관이 있는 세계, 그게 판타지와 SF의 전제다. 그래서 외계가 배경이 되고 중력이 지구의 몇백 배 되는 설정이 나오고 인간이 아닌 다른 종에서 발전한 우세 인종이 등장한다. 인물 말고 세계 자체가 신기한 이야기들이라 할 수 있다.”

그는 SF를 “일어날 수도 있는 세계의 가능성을 제시하는 장르” “이야기의 제약을 벗어난 새로운 도구” “지적 경이감을 주는 세계”로 설명했다. SF에 대해 사람들이 가장 크게 오해하는 게 뭐냐고 묻자 그는 “애들이나 보는 책”이라고 대답했다.

“SF를 ‘공상과학소설’이라고 번역하는데 이게 문제가 많다. 공상과학이라는 말에는 애들이나 보는, 비현실적인 이야기라는 의미가 있다. 하지만 SF는 고도로 지적인 쾌감을 주는 장르다. 철학자나 과학자, 학문적 성취가 높은 사람들도 SF를 많이 쓴다. 정보라도 그중 한 명이다. 사고실험이 SF에 많다. 우리가 언어의 일부를 빼앗긴다면, 성(性)의 구별이 없는 사회가 있다면, 자폐아에게 머리가 좋아지는 주사를 놓는다면, 지구와 완전히 다른 행성이 있다면… 이런 흥미로운 사고실험이 진행된다. 그래서 SF는 어른들이 더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장르다.”

부커상 측은 ‘저주토끼’에 대해 ‘사변소설’(Speculative Fiction)이란 말을 썼다. SF는 근래 사변소설로 불리는 경우가 많다. 최지혜는 “사변소설은 SF의 사고실험을 강조하는 말”이라며 “과학 우주 로봇 등이 안 나와도 현실 세상의 법칙과 다른 세계에 대한 사고실험을 담고 있다면 그것도 SF에 해당한다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SF는 세계성이라는 한국 문학의 과제를 해결해줄 돌파구로도 주목받는다. 최지혜는 “세계는 과학으로 다 이어져 있고 과학을 전제로 한 이야기라면 장벽이 훨씬 낮다”고 말했다. 이어 “미국의 유명한 SF작가 테드 창이 한국에 왔다가 ‘한국은 그 자체로 SF다’라고 얘기했는데, 한국이란 나라가 근미래의 디스토피아를 뜻하는 ‘사이버 펑크’ 이미지가 강하다. 첨단 기기를 누구나 막 쓰는 나라이고 여의도 송도 해운대 등의 마천루 이미지는 되게 미래적이다. 그러면서도 전통적이고 독자적인 문화가 살아 있다. 이런 이미지의 조합이 한국 환상문학이나 SF에 많이 나온다”면서 “외국에서 봤을 때 새로운 놀라움이 있다”고 덧붙였다.

‘거울’은 문단에서 외면한 작품들, 등단하지 못한 작가들, 열혈 장르문학 팬들과 함께 작은 공동체를 이뤄왔다. 그 속에서 한국 문학의 새로운 엔진이 만들어졌다. 내년이면 ‘거울’이 창립 20주년을 맞는다. 최지혜는 “우리는 장르문학의 보루로 언제든 이 자리에 있을 것”이라며 “설사 SF 붐이 사라진다고 해도 언제든 작가들이 돌아올 수 있는 곳으로, 어디에도 발표하지 못하는 글을 발표할 수 있는 곳으로 계속 유지하려 한다”고 말했다.

김남중 선임기자 nj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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