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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마당] 전기의 역습



1964년 4월 박정희정부는 ‘전력 해방’을 선언했다. 경성전기·남선전기·조선전업 세 전기회사를 통합한 한국전력이 발전시설을 확충해 광복 후 처음 무제한 송전 시대를 열었다. 전력이 부족해서 전기 공급을 끊는 단전 조치가 사라졌다. 하지만 넉넉한 전기의 세상은 오래가지 못했다. 1967년 극심한 가뭄이 들었다. 강물이 줄어 수력 발전량이 급감하자 3년 만에 제한 송전을 재개했다. 경제개발로 속속 들어선 공장의 전력 수요를 감당하지 못한 결과였다. 큰 공장은 나흘에 하루, 작은 공장과 가정은 엿새에 하루씩 전기가 끊겼다.

화력발전을 늘려 1970년대를 버티던 정부는 오일쇼크를 겪고 원전에 눈을 돌렸다. 고리 1호기부터 잇따라 건설된 원전은 1980년대 발전량의 47%를 차지하며 고속성장을 감당했다. 그래도 전력난은 다시 찾아왔는데, 이번엔 에어컨이 문제였다. 그렇게 빨리 에어컨이 보급될 줄 몰랐던 한전은 1990년대 초 여름마다 ‘810작전’을 벌였다. 사람들이 여름휴가에서 일제히 복귀하는 8월 10일 전후로 전력소비가 급증하곤 해서 007작전 펴듯이 예비전력 확보에 나섰다. 정부는 8년 동안 지으려던 서인천 천연가스 발전소를 2~3년 만에 해치워 수도권 제한 송전 위기를 넘겼다.

2011년 9월 15일에는 전국적인 블랙아웃이 벌어졌다. 원전 셋이 정비를 위해 멈춰선 사이 늦더위로 전력 소비가 급증해 대규모 정전사태를 겪었다. 지능형 전력망을 추진하던 정부는 체면을 구겼고, 이명박 대통령은 한전에 쫓아가 책상을 내리쳤다. 다시 10년이 지난 지금은 우크라이나 전쟁이 에너지 공급망을 뒤흔들어 세계가 전력난을 겪고 있다. 한국은 지난 5년간 폭탄 돌리듯 미뤄온 전기료 인상이 인플레이션과 맞물려 터지면서 물가 폭등에 기름을 부었다. 개발도상국일 때도, 중진국일 때도, 경제대국이 돼서도 전력난은 늘 이렇게 도사리고 있었다. 틈이 보이면 여지없이 고개를 쳐들어 우리를 곤경에 빠뜨려 왔다. 전기가 없으면 돌아가지 않는 문명을 일궈놓고선 전기를 너무 아무렇지 않게 써댄다고 나무라듯이….

태원준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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