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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웅빈 특파원의 여기는 워싱턴] 美 경기침체 ‘공포’… 신흥국 자금 5개월 새 380억 달러 이탈

미국 뉴욕에서 지난 27일(현지시간) 한 시민이 슈퍼마켓에서 식료품을 고르고 있다. 최근 미국에선 소비자들이 전자 제품이나 자동차 등 값비싼 물품보다는 휘발유와 생필품 등 생활 필수 항목에 더 많은 지출을 하고 있다. 소비 둔화가 시작되며 경기침체가 왔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AP뉴시스




지금 미국에서는 경제가 침체기에 접어들었느냐를 두고 논쟁이 한창이다. 기술적으로는 국내총생산(GDP) 증가율이 2개 분기(1분기 -1.6%, 2분기 -0.9%) 연속 마이너스 성장률을 기록해 경기침체 초입에 진입했다는 해석이 나온다. 반면 조 바이든 행정부는 탄탄한 일자리를 들어 불황이 아니라고 강력히 항변하고 있다. 지난달 소비자지출도 여전히 견고했다.

그러나 시장에서는 지출의 성격이 달라졌다고 지적하고 있다. 인플레이션으로 같은 물건을 비싼 값을 주고 소비하느라 지출 규모가 커졌을 뿐 소비 둔화는 이미 시작되고 있다는 것이다.

생필품에만 지갑 여는 소비자

미 상무부 경제분석국이 29일(현지시간) 발표한 지난 6월 개인소비지출은 전월 대비 1811억 달러(1.1%) 증가했다. 개인소비지출은 소비자들이 지갑을 얼마나 열고 있는지를 파악하는 지표다. 소비가 경제활동의 4분의 3을 차지하는 미국에서는 경제 상황을 판단할 때 가장 눈여겨보는 기준 중 하나로 꼽힌다. 바이든 대통령은 미국이 경기침체가 아니라는 주장을 펴면서 고용지표와 함께 소비지출 증가를 언급했다. 불황이라면 소비자들이 지갑을 닫았을텐데 그렇지 않고 소비를 늘렸으니 경기침체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씀씀이의 질이 떨어졌다. 경제 분석 회사 글로벌 데이터 네일 손더스는 이번 데이터를 보면서 “겉으로는 견고해 보이지만 본질적으로는 미국인들이 같은 양의 물건을 사기 위해 더 많은 돈을 썼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실제 소비자지출은 주로 생활 필수 항목에서 증가했다. 뉴욕타임스(NYT)는 “지출 내역에서 가장 두드러진 건 휘발유였고, 주택과 유틸리티, 식품 및 의료에서도 큰 비용 지출이 있었다”고 분석했다. 식음료 지출은 지난 5월 8.4%, 지난 6월 3.6%로 계속 증가했는데, 콘서트나 스포츠 경기 관람 등 레크리에이션 항목 등은 감소했다.

워싱턴포스트(WP)도 “소비자들은 여전히 돈을 쓰고 있지만, 인플레이션으로 더 많은 돈이 휘발유와 생필품에 쓰이고 의류나 전자 제품과 같은 범주에는 덜 쓰이고 있다”고 설명했다. 소비자들이 생존을 위해 본인 의지와 상관없이 써야 하는 ‘비재량 지출’만 하고 있고, 불필요한 소비는 줄이고 있다는 의미다.

마스터카드는 지난주 실적 발표를 하면서 “부유층 지출은 계속 강세를 보이는데, 그렇지 않은 계층에서는 완만한 둔화가 목격되고 있다”며 “인플레이션이 비재량 항목에 큰 타격을 주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소매업체들은 이런 소비자 씀씀이 변화를 체감하고 있다. 월마트는 소비자들이 식료품과 휘발유 구매를 위해 의류나 가전제품 구매를 포기하면서 자사 수익률이 하락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월마트는 의류나 가전제품 재고가 쌓여서 이를 해소하기 위해 대규모 세일도 추진하기로 했다. 타켓, 달러트리, 메이시스 등 다른 소매업체들도 같은 상황을 겪고 있다고 발표했다.

미국인들의 재정 상황도 나빠졌다. 저축률은 전월 5.5%에서 6월 5.1%로 감소해 지난 2009년 이후 가장 낮은 수준으로 하락했다. 5월 미국인들은 가처분 개인 소득의 5.4%만 저축했는데, 이는 전년 동기의 12.4%에서 절반 이하로 쪼그라든 것이다. 생필품 위주로만 소비하고 있는데도 가격 인상으로 저축할 돈이 부족해졌다는 것이다.

개인소득 증가율은 소비지출 증가율을 따라가지 못했다. 월급은 조금 올랐는데, 생필품 가격은 크게 올라 소비자들이 기존 소비 수준을 유지하려면 저축을 소진하거나 빚을 내야 한다는 의미다.

홈디포 공동설립자 켄 랭곤은 “경기침체를 뭐라고 정의하든 경제는 후퇴하고 있다. (침체가 아니라는 건) 말장난일 뿐”이라며 “내가 보는 곳마다 후퇴의 징후가 보인다”고 말했다.

5개월 연속 신흥국 자금 이탈

경기침체 공포는 글로벌 시장을 흔들고 있다. 당장 신흥국 자금이탈이 계속되고 있다. 국제금융협회(IIF)에 따르면 이달 신흥국 주식과 채권에서 빠져나간 외국인 자금이 105억 달러에 달한다고 파이낸셜타임스(FT)가 보도했다. 지난 3월부터 5개월 연속 자금 순유출이다. 이 기간 빠져나간 외국인 자금은 모두 380억 달러인데 그중 27.6%가 이달 이탈한 것이다. 신흥국에서 외국인 자금이 5개월 연속 순유출된 것도 IIF가 관련 통계를 집계하기 시작한 2005년 이후 처음이다.

조너선 포천 바르가스 IIF 이코노미스트는 “자본 유출이 신흥 시장에서 비정상적으로 널리 확산하고 있다”고 말했다.

JP모건에 따르면 프론티어국과 신흥국 최소 20곳의 외화 채권 수익률은 미 국채 수익률보다 10% 포인트 높다. 경기침체 우려로 안전자산 선호 심리가 강화하면서 이들 국가의 외화 조달 비용이 커졌다.

유럽과 호주 등 다른 선진국에서도 이미 경기침체가 시작됐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블룸버그는 “독일 통계청은 공식적으로 지난 2분기 GDP 증가율이 0.0%로 정체됐다고 발표했지만, 소수점 끝자리를 보면 실제로는 0.04% 감소했다”며 “독일의 경기침체는 이미 시작됐을 수 있다”고 보도했다.

짐 차머스 재무장관은 지난주 호주 경제 성장률 전망치를 하향 조정하는 성명을 발표하며 “높은 금리와 전 세계 경기 둔화가 경제 성장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전했다.

고린차스 국제통화기금(IMF)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지난주 세계 경제성장 전망치를 하향 조정하며 “조만간 글로벌 경기침체가 시작될 수 있다. 지난 4월 이후 전망이 크게 어두워졌다”고 말했다.

워싱턴=전웅빈 특파원 imu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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