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영성 작가] 욕망이 시키는대로 완벽한 행복을 좇는가 그건 영원한 곳에 있다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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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중엽 영국 지성을 대표하는 새뮤얼 존슨(1709~ 1784·아래 사진)은 시인이자 평론가이다. 그리스도교적 색채를 담은 그의 작품들은 17세기 블레즈 파스칼과 19세기 쇠렌 키르케고르의 영적 계보를 잇는다는 평을 받는다. 그는 신앙적으로는 성례전과 교회의 권위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고교회파(High Church) 성공회 신자였다.

그의 글쓰기는 자기 성찰에서 시작한다. 거기에 성서와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통합해 모두에게 적용 가능한 도덕률과 원리를 전한다. 대표적인 사례가 그의 인생관이 담긴 소설 ‘라셀라스’이다. 국내 독자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지만, 영국의 계몽주의적 이성이 도달한 인생 철학을 가장 명료하게 구현한 문학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존슨은 누구나 행복하길 원하는 현대인들의 행복에 관해 이야기한다.

부족한 것이 없는 ‘행복의 골짜기’에 사는 아비시니아(옛 에티오피아)의 왕자 라셀라스는 자신을 둘러싼 행복을 의심한다. 그는 완벽한 행복을 찾아 여동생 네카야 공주, 학자 이믈락과 함께 그곳을 탈출해 세상으로 나온다. 그들은 가는 곳마다 똑같은 질문을 던진다. ‘완전하게 행복한 삶이란 무엇인가?’ 돌아오는 답은 ‘완벽한 삶의 선택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절대적 행복의 환상을 비판하는 이 풍자적 산문은 현대 독자에게 진부하게 다가올 수 있지만, 작품에 담긴 존슨의 사유와 성찰은 현재도 공감할 수 있는 본질적인 것이다.

존슨은 ‘절대적 행복에 대한 인간의 소망과 노력은 헛되다’는 결론을 작품의 첫 문단에서 암시한다. “공상이 속삭이는 소리를 곧이곧대로 들으며 희망의 환영을 열심히 좇아가는 사람들이여, 나이를 먹으면 젊은 날의 기대가 이루어질 것이며 오늘 부족한 것이 내일이 되면 채워질 것이라고 기대하는 이들이여, 아비시니아의 왕자 라셀라스에 관한 이야기에 한번 귀를 기울여보라.”(‘라셀라스’ 제1장 중)

왠지 솔깃해진다. 그러나 짐작하듯이 왕자 라셀라스는 물질적 감각적 욕구가 모두 충족돼도 인간에겐 채워지지 않은 정신적 욕구가 남는다는 것을 느낀다.

“나에게 있는 감각 능력 가운데 합당한 즐거움으로 충분히 만족을 얻지 못한 것은 하나도 찾아볼 수가 없어. 하지만 나에게는 기쁘고 즐겁다는 느낌이 없단 말이야. 인간에게는 분명히 이와 같은 곳에서는 충족시킬 수 없는 어떤 감각이 숨겨져 있는 게 틀림없어. 아니면 감각과는 다른 어떤 욕구가 존재하고 있어서 그것이 채워진 뒤에야 비로소 인간은 행복해질 수 있는 것임이 틀림없어.”(‘라셀라스’ 제2장 중)

작가는 마지막 결론의 장에서 ‘최상의 행복 성취를 위해 어떤 인생을 선택해야 하느냐’란 질문엔 답이 없다는 것이 답이라는 역설을 내놓는다. 작품은 절대적인 행복은 이 세상에서 이루어질 수 없다는 사실을, 따라서 행복에 도달하기 위한 모든 인간의 기획이나 노력이 헛된 것이었다는 허무한 인식을 수반한다.

인간이 행복하지 못한 원인은 ‘욕망의 무한성’이다. 이는 참다운 행복이 불가능한 핵심적인 원인이다. 욕망은 삶을 정체되지 않고 보다 나은 쪽으로 발전하게 만드는 희망의 원동력으로 작용할 수 있지만, 반대로 항상 뭔가에 쫓기며 삶을 끊임없이 괴롭히는 무한한 굶주림과 결핍으로 작용한다. 왜냐하면 행복에 대한 소망은 너무나 깊이 우리 마음에 새겨져 있어서 아무리 오랜 경험을 쌓아도 지워지지 않기 때문이다.

“현재의 삶이 어떻든 간에 우리 인간은 늘 불행하다고 느끼기 마련이고, 또 그런 느낌을 밖으로 털어놓지 않으면 안 되게 돼 있소. 하지만 시간이 흘러 현재의 이 삶을 멀리서 다시 바라보게 될 때 우리의 상상력은 그것을 바람직한 것으로 채색하기 마련인 것이오.”(‘라셀라스’ 제22장 중)

‘라셀라스’는 지혜롭고 냉철한 구약성서 전도서를 떠올리게 한다. 이 소설은 돈, 명예, 아름다움, 정치 권력, 장수만 있으면 영구적으로 행복할 거라는 기대가 실망으로 이어질 거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 가르침의 교훈은 희망적이다. ‘진리는 정직하게만 찾는다면 어디서든 항상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과보다는 과정, 현재가 중요하다.

따라서 행복이 외부환경에만 의존하도록 내버려 둬서는 안 된다. 존슨은 “최소한의 불행을 겪으면서, 가장 큰 행복을 얻는 기술은 작은 것을 관찰함으로써 얻을 수 있다”고 말했다. 희망 자체가 일종의 행복이란 것이다.

죽을 운명의 인간들은 사람과 건설적인 말, 천국의 소망으로 실망을 견디는 법을 배울 수 있다. 공주 네카야의 말이다. “저에게는 이제 인생의 선택이 별로 중요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바라건대, 앞으로는 영원의 선택에 대해서만 생각할까 합니다.”(‘라셀라스’ 제48장 중) 욕망과 집착의 그물에 사로잡혀 어리석은 선택과 고민에 부대끼는 일상에서 우리의 정신을 깨어나게 한다.

존슨은 인생무상과 허무라는 상식과 이치를 삶 속에서 가능한 한 반복적으로 일깨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실 ‘라셀라스’는 그의 어머니가 임종을 맞이하던 무렵에 쓰였다. 그의 전기에 의하면 존슨은 고향 리치필드에 사는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곧 필요할 장례 비용과 빚을 갚기 위해 ‘라셀라스’를 집필하기 시작했다. 어머니의 죽음이라는 극도의 슬픔과 삶의 중대한 위기 순간에 직면했지만, 존슨은 이를 삶의 의미와 본질을 성찰하는 창조적 계기로 삼았다. 결국 ‘라셀라스’는 그의 삶 속에서 오랫동안 숙성된 인생관이 어머니의 죽음이란 계기를 통해 창조적 형태로 발현된 결과물이다.

존슨은 평생 영원이란 주제를 숙고하고 이생을 ‘영원의 서곡’으로 바라보는 관점을 가졌다. 그의 신앙은 쉼 없이 씨름하고 사색했다. ‘나는 구원 받았을까?’ 하는 의문이 늘 괴롭혔다. 그리스도께서 구원의 문을 열어놓으셨지만, 그 문은 개인이 순종과 회개로 들어서야 하는 문인데, 자신이 과연 그렇게 살고 있는지 존슨은 의심하며 괴로워했다. 그의 전기를 쓴 제임스 보즈웰은 “존슨의 마음은 원형경기장, 로마 콜로세움과도 같아 거기서 존슨은 검투사처럼 온갖 적, 맹수들과 사투를 벌였다. 그래서 일단 몰아내지만, 그들은 또 돌아와 존슨을 공격했다”고 적었다.

밤낮없는 사색과 영적 씨름을 했던 새뮤얼 존슨의 삶의 태도는 그의 아름다운 기도 시에서도 잘 나타난다. “오 하나님/모든 날이 주님의 은사로 주신 것이니/이날들을 주님의 뜻에 따라 보내야 함을/저로 하여금 깨닫게 하소서/그리하여 저의 모든 잘못을 회개하고/주님의 은총을 받을 수 있게 하시고/저에게 맡겨 주신 모든 날을/주님의 뜻을 충성스럽게 성취하는 데/쓸 수 있게 하소서.”(시 ‘당신의 자비로써 이 죄 많은 인간을’ 중)

새뮤얼 존슨은 영국 중부 리치필드 서적상의 아들로 태어났다. 옥스퍼드 대학에 입학해 뛰어난 지성으로 주목을 받았지만, 가난으로 학업을 마치지 못했다. 그런 그가 조교들의 도움만으로 오랜 작업 끝에 1755년 영국 최초로 영어사전을 발간해 영문학 발전에 기여한 사실이 놀랍다. 이 사전은 한 세기 동안 영어 용례의 기준을 제시했고 그를 유럽 전역의 유명인사로 만들었다. 150년 후 옥스퍼드 영어사전이 완성되기 전까지 존슨의 영어사전은 영국의 대표적인 사전이었다. 이런 업적으로 옥스퍼드대 중퇴생인 존슨은 ‘존슨 박사’(Dr. Johnson)로 불렸다. 이외에 ‘아이린’(1749) ‘런던’(1738) ‘인간소망의 헛됨’(1749) 영국의 시인 52명의 전기와 작품을 정리한 ‘영국 시인전’ 10권(1779~1781) 등을 발표했다.

이지현 선임기자 겸 논설위원 jeeh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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