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미분류  >  미분류

악마의 편지에 비친 나의 실상





다시 펴보지 않는 책이 있는가 하면, 거듭 꺼내 드는 책이 있습니다. 악마가 보낸 서른 한 통의 편지를 묶은 ‘스크루테이프의 편지’(홍성사)는 손때와 메모, 밑줄이 가득한 책 가운데 하나입니다. 작가 CS 루이스는 어떻게 이 서른 한 통의 편지를 ‘손에 넣게 되었는지는’ 굳이 밝히지 않습니다.

다만 그가 이 편지 묶음을 세상에 ‘공개’하는 연유는, 악마와 관해 인류가 빠지기 쉬운 두 가지 오류를 염려하기 때문입니다. 첫째 오류는 악마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 둘째는 악마에 대한 불건전한 관심을 과도하게 두는 것입니다. 악마는 이 두 가지 오류를 똑같이 반기는데 “유물론자와 마술사를 가리지 않고 열렬히 환영”한다는 게 루이스의 지적입니다.

읽는 이라면 짐작하고도 남듯, 노회한 악마 스크루테이프의 이름으로 쓴 편지 서른한 통은 루이스가 쓴 글입니다. “자신의 마음을 악마의 마음으로 비트는” 과정에서 ‘영적 경련’에 시달린 그는 오죽하면 “거의 질식할 지경”이 되었다 했을까요. 확장판을 써 달라는 주변의 끈질긴 요청이나 권고에도 그의 마음이 도무지 움직이지 않은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이렇듯 루이스가 스크루테이프의 마음에 이입되어 써 내려간 편지들은 일상의 삶과 신앙생활 속에 악마가 어떻게 침노하고 틈입해오는지 예리하게 보여줍니다. 그와 더불어 인간을 집어삼키려는 악마 세계의 고난도 전략을 폭로합니다.

존 밀턴의 말대로 악마들은 서로 지독하게 굳건히 뭉치는데, 이들을 움직이는 두 가지 동력이 ‘징벌(지옥)에 대한 두려움’과 ‘강렬한 지배의 열망(탐욕)’이라고 루이스는 말합니다. 그는 이 책을 악마들을 고찰하고 드러내기 위해 쓰지는 않았다고 말합니다. 이 책의 진정한 목적은 악마의 시선과 목소리를 통해 오히려 인간의 삶과 본성, 신앙의 본질을 새로운 관점으로 비춰보는 데 있다고 강조합니다. 그 때문일까요. 책을 거듭해 읽을 때마다 신앙인으로서 저 자신이 어느새 위선과 허위의 가면을 쓰고 있지 않은지 절로 생각에 잠기게 됩니다. 아울러 영원한 세계에 속한 영적 존재이면서 유한한 시간에 매인 동물적 존재인 인간의 실존과 제 실상을 성찰하게 됩니다.

사십대에 들어선 어느 날 책을 다시 읽으며 맞닥뜨린 문장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풍요로운 중년기를 보내는 인간은 ‘세상에서 내 자리를 찾았다’고 생각하지. 사실은 세상이 자기 속에서 자리를 찾은 것인데도 말이야.” 이어서 “진정한 세속성은 시간의 작품이야”라던 스크루테이프의 목소리에 이르면 가슴이 서늘해집니다. 오십대 중반인 지금도 그렇듯, ‘스크루테이프의 편지’는 앞으로도 변함없이 시시때때로 펼쳐 제 실상을 비추어보는 거울 같은 책으로 남을 것입니다.

옥명호 잉클링즈 대표 (‘나를 넘어서는 성경 묵상’ 저자)


트위터 페이스북 구글플러스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