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박희천 (13) 귀국후 내수동교회 목사로… 말씀 연구·설교 준비 온 힘

박희천 목사가 1995년 강원도 철원 김화수양관에서 열린 설교학 세미나에서 강의하고 있다. 내수동교회는 설교 요약이 담긴 주보와 설교 테이프를 무료로 나눴다.


‘이번 집회에 실패하면 나도 망신이지만, 박윤선 목사님에게도 폐를 끼치는 일이다.’ 죽을 각오로 일주일간 11차례 설교를 했다. 다행히 학생들의 평가도 좋았다. 1975년 4월 내수동교회 6대 목사로 부임했다. 전임 신복윤 목사님이 나를 천거해 오게 된 것이다. 신 목사님은 사임 후 총신대 교수로 일하다 후일 합동신학대학원대 총장을 역임했다.

유학을 다녀와서 몇몇 교회에서 시무했지만 별다른 성과가 없었다. 이 교회에 부임할 때 “내수동교회에 뼈를 묻겠다”고 단단히 각오했다. 오로지 설교를 잘하는 것밖에는 길이 없었다. 설교는 성경을 얼마나 봤느냐에서 판가름이 난다. 나는 성경 말씀을 열심히 연구하고 설교를 준비하면서 ‘우리 교인들의 주일을 영적인 면에서, 질적인 면에서 다른 어떤 날보다 나은 하루로 만들겠다’는 다짐을 했다.

우리 교인 중에는 경기도 안산에서 출석하는 성도도 있었다. 이런 성도를 책임진다는 생각으로 설교에 주력했다. 엘리야가 먹던 진리의 떡과 진리의 고기(왕상 17:1~7)를 대접하려고 애썼다. 나는 교인들에게 주일 성수(출 20:8~11), 온전한 십일조(말 3:7~12), 매일 성경(행 17:11), 매일 기도(살전 5:17), 열심 전도(행 5:42)를 강조했다. 설교 준비와 함께 결석 교인도 열심히 챙겼다.

1950년대 주일학교 유년부를 맡았을 때 빠진 학생을 점검한 경험을 살린 것이었다. 내가 부임할 당시 내수동교회 장년은 140여명이었다. 각 구역에 출석부를 배부해 예배 참석 여부를 꼼꼼히 점검했다. 5시에 교역자 회의에서 출석부를 재점검하고 7시 회의에서 그날 결석한 교인 한 분 한 분에게 전화 심방을 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통화하다 보면 밤 9시가 됐다.

그제야 집에 와서 저녁밥을 먹었다. 부임 2년 차에는 교인이 290명으로 늘었다. 4년 후에는 530명으로 성장했다. 나는 장년 교인들의 이름뿐만 아니라 아이들의 이름도 다 외웠다. 매 주일 교회 문 앞에서 사람들의 이름을 부르며 인사를 하면 모두 좋아했다. 담임목사가 자기 이름을 안다는 것에 친밀감을 느끼는 것 같았다.

교인 500명까지는 출석 점검이 9시 무렵 끝났지만 800명으로 늘어나니 사무가 많아졌다. 밤 9시가 넘어 전화를 걸면 실례라 하는 수 없이 월요일까지 기다렸다가 전화를 했다. 월요일 오전 9시부터 전화했다. 오전에 체크가 끝나면 전화기가 없는 집은 직접 방문했다. 그 일을 하느라 월요일에도 쉴 수가 없었다. 월요일에 교인들 집을 돌고 오면 몸은 피곤했지만 마음이 편했다.

나는 ‘목자들이 없으므로 그것들이 흩어지고 흩어져서 모든 들짐승의 밥이 되었도다’란 성구가 있는 말씀(겔 34:2~6)을 떠올리며 철저히 결석 점검을 했다. 내가 과한가 생각을 하다가도 이사 간 교인들의 안부 전화를 받으면 힘이 났다. “목사님, 지금 나가는 교회는 제가 한 달을 빠져도 아무 말이 없어요. 내수동교회는 한 주일만 빠져도 목사님이 전화하시는데 여기는 관심이 없나 봐요.”

정리=강주화 기자 rula@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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