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강국창 (6) “일본이 만드는 냉장고 부품, 직접 만들어 보자”

30대 초반 동남샤프 근무 시절의 강국창 장로가 어머니 박선규 여사와 함께 서울 영등포구 대림동 집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동신화학에 입사한 지 3년쯤 지났을 때였다. 나는 거의 매일 야근을 자처하는 꽤 성실한 회사원이었다. 일이 재미있었고 또 사명감으로 상사를 따라다니며 기술을 익히고 배웠다. 당시 국내 가전업계는 금성사(현 LG)가 주도하는 가운데 대한전선 삼양전기 동신화학 등이 포진하는 상황이었다. 국내 최초 냉장고인 금성사의 눈표냉장고를 시작으로 다른 기업에서도 냉장고 개발에 한창 열을 올리고 있었다.

당시 전자제품 기업들은 대부분 해외 선진국과 제휴를 맺고 기술을 배워오는 실정이었다. 우리나라는 대부분 일본에서 건너온 부품을 조립하고, 케이스만 그럴듯하게 생산하는 수준이었다. 답답한 노릇이었다.

엔지니어인 나는 회사 차원의 일본 출장이 잦았다. 제휴 업체들은 기술을 공유한다기보다는 중요 부품을 선심 쓰듯 제공한다는 분위기가 강했다. 겉으로는 깍듯하고 친절한 것 같았지만 제 잇속만 챙기는 모습이 눈에 환해 화가 치밀기도 했다.

때로는 우리 엔지니어들은 그들이 보물단지처럼 여기는 기술 노트를 입수하기도 했다. 또 물밑 작업으로 얻어낸 기술을 써먹기도 했다. 이처럼 나의 엔지니어 생활은 치열했고 열정적이었다. 하지만 입사 5년 차가 되던 때 회사 경영에 빨간불이 켜졌다.

방만한 경영 탓인지 한 차례 외환 위기에 휘청하더니 순식간에 부실기업으로 전락했다. 나는 살길을 찾아야 했다. 여기저기서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왔다. ‘이제 기업의 자산 규모나 크기보다는 내가 정말 전방위로 일할 수 있는 곳으로 가자.’ 이렇게 결심하고 선택했다.

“저는 동남샤프로 갑니다.” “아니 강 과장, 다른 데서도 오라고 그러는데 왜 하필 거기로 정했어?” “소꼬리보다 닭 머리가 되기로 결정했습니다.”

동남샤프로 이직한 뒤에도 나는 냉장고 개발 관련 업무를 이어갔다. 현장을 진두지휘하다 보니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우리는 왜 부품 하나 만들 생각을 안 할까. 우리가 직접 만들면 될 텐데.’

이런 생각이 더 깊어지면서 어느 날 ‘그래, 일본이 만드는 부품을 내가 만들어보자!’는 생각이 번뜩 스쳤다. 1970년대 치열해지는 전자제품 개발 현장 속에서 이른바 ‘블루오션(경쟁자가 없는 유망한 시장)’을 만난 듯했다. 이 시장을 개척하고 싶다는 열망은 날이 갈수록 끓어올랐다.

나는 회사 개발실에 틀어박혀 일본 출장 중에 본 기억과 상상을 조합해 시뮬레이션을 해보면서 협력업체를 통해 부품을 만들어 보게끔 했다. 협력업체에서는 난색을 표하곤 했다. “부장님, 우리 기술자들도 못 하겠다고 하네요. 그냥 편하게 수입해서 쓰시지요.”

이런 말을 들을수록 오히려 오기가 생겼다. 직접 만들어야겠다는 의지가 불끈 샘솟았다. 1976년, 나는 과감히 사표를 던지고 부품 개발에 본격적으로 나서기로 결단했다. 주변에선 “탄탄한 직장을 놔두고 왜 가시밭길로 가느냐”고 혀를 찼지만 상관없었다.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의 목적이 단순히 먹고사는 데 그쳤다면 이런 결정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정리=박재찬 기자 jeep@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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