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강국창 (8) 국산품 보호법에 주문 폭주… 성공의 달콤함에 푹 빠져

강국창 장로가 처음 국산 부품으로 개발한 냉장고용 자석패킹 부품. 작은 사진은 냉장고 성에를 방지하는 서리제거용 제상장치 부품.


상공부 담당 직원을 만났다. “생각해 보십시오. 정부에서는 국산 제품을 만들라 하는데 저희 같은 회사에서 만든 국산 부품을 써주지 않는 기업은 문제가 있는 것 아닙니까. 우리 제품은 결코 성능에서 뒤처지지 않습니다. 충분히 경쟁력이 있습니다. 그러니 국산 부품을 보호하는 법을 만들어 주십시오.”

상공부 직원은 최대한 긍정적으로 검토하겠다고 약속했다. 얼마간 시간이 흐른 뒤, 마침내 국산품 보호법이 만들어졌다. 골자는 국내에서 개발된 부품에 한해서는 수입을 금지한다는 것이다. 그러자 시장의 판도가 확 바뀌었다.

자석패킹은 국산품 보호가 되었기 때문에 우리 업체 제품만 사용해야 하는 독과점 현상이 벌어지면서 물량을 감당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서둘러 공장을 증설했다. 회사에는 하루에도 몇 번씩 대기업 담당자들이 들렀다. 하나같이 부품을 납품해 달라는 부탁을 해왔다. 수요가 몰려 공장을 제3공장까지 늘렸다.

우리는 또 다른 부품 개발에 들어갔다. 당시 냉장고의 가장 큰 문제는 성에가 낀다는 것이었다. 내외부 온도 차를 일정 범위 내로 유지해야 성에가 생기지 않는데 당시 우리나라엔 아직 그런 기술이 부족했다. ‘어떻게 하면 얼음을 제거할 수 있을까…그래, 히터!’

곧바로 개발팀과 함께 서리 제거용 제상장치 개발에 돌입했다. 결국 개발에 성공하면서 납품까지 이어졌다. 두어 명에서 시작한 회사가 공장 3곳과 직원 500여명을 둔 기업으로 커졌다.

돌이켜보면 시간이 중요했다. 어떻게 첫 단추를 끼우느냐에 따라 두 번째, 세 번째는 쉬워진다. 흘러가는 방향에 편승하기보다 한 걸음 빗겨나되 우리만의 기술력으로 흐름을 선도적으로 따라잡는 것이 주효했다.

직원 수백 명을 이끌고 공장을 이끌 때는 젊고 패기가 넘치는 40대 초반이었다. 경쟁 상대가 없는 시장을 개척하다 보니 자신감이 충만했던 것 같다. 시간이 지나 우리 회사의 급성장을 경계하는 업체들이 하나둘 생겨났다. 그뿐만 아니라 산업스파이 활동도 막 시작되던 때라, 우리 회사에서 일하던 직원이 동종업계로 스카우트돼가기도 했다.

‘그래, 사람과 기술이 빠져나가는 건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우리가 보유한 핵심 기술과 정신만큼은 빼앗기지 말자.’ 이런 마음으로 회사를 운영했다. 그런데 회사 규모가 커지다 보니 경영이 필요해졌다. 조직을 운영하고 시스템을 만들고 자금을 운용할 수 있어야 했다. ‘그래, 나 한 사람이 모든 걸 관리할 수 없다. 적절한 인력을 뽑아 활용하자.’ 필요한 인재들을 영입한 뒤 나는 최종 결정권만 행사하며 개발에 열중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새마을 운동이 전국에서 활발할 때 공공기관과 군부대에서 나에게 성공 사례 강의를 부탁했다. 거절하기 힘들 정도로 간청해 여기저기 불려 다녔다. 그러면서 나는 성공과 명예를 동시에 경험하는 달콤함에 푹 빠져들었다. 휘몰아치듯 다가오는 성공이라는 태풍에 사로잡혔다. 40대, 어떤 것에도 흔들리지 않는다는 불혹에 나는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정리=박재찬 기자 jeep@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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