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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마당] 고르바초프와 푸틴



1974년 어느날 러시아 남부 스타브로폴 지역의 고려인들이 지방 당서기인 미하일 고르바초프를 찾아왔다. 수확한 양파 중 일부를 집단농장에 주고 나머지를 자기들 소유로 해달라고 했다. 허가를 받자 고려인들은 밤낮으로 일하고 높은 수익을 올렸다. 하지만 공산당 기율위원회가 사회주의 원칙을 어겼다며 고려인들을 쫓아냈다. 이후 양파 자급이 안돼 전량 우즈베키스탄에서 수입했다. 이를 본 고르바초프는 효과적인 노동 인센티브 도입 필요성을 절감하며 “더 이상 이렇게 살 수는 없다”고 다짐했다(고르바초프의 ‘선택’).

1985년 최연소 소련 공산당 서기장에 오른 고르바초프는 “우리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볼 것이다”라는 취임 일성을 밝혔다. 고려인 사례 등을 통해 본 소련의 부조리, 비효율성을 인정하고 앞으로 나아가겠다는 의지였다. 이후 페레스트로이카(개혁), 글라스노스트(개방)를 외치며 세계 역사를 바꿨다. 냉전을 종식시키며 지금의 독일과 동유럽, 중앙아시아 국가들의 탄생을 이끌었다. 미국 주간지 타임 등 서방 언론들은 그를 ‘공산주의 세계의 교황’ ‘소련의 마르틴 루터’ 등으로 극찬했다.

서방이 그에 열광할 때 참담함을 금치 못하는 이들도 있었다. 베를린 장벽 붕괴 현장에서 기밀 서류를 불태우던 소련 첩보기관 KGB의 30대 동독 주재원 블라디미르 푸틴도 그중 한 명이었다. 동독과 소련이라는 국가의 몰락이 국민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를 목격했다. 푸틴은 권좌에 오른 뒤 소련 붕괴를 “20세기 최대의 지정학적 재앙”이라고 표현했다. 그리고 ‘악의 제국’ 부활을 위해 잇단 전쟁을 벌여 왔다. 올해 2월 우크라이나 전쟁은 사실상 신냉전의 시작을 알렸다. 냉전 해체를 가져온 고르바초프에 대한 전면 반기다. 지난 30일(현지시간) 세상을 떠난 고르바초프는 오랜 투병으로 말이 없었지만 누구보다 역사의 퇴행에 가슴 아팠을 것이다. 약 반 세기 전 “더 이상 이렇게 살 수는 없다”는 각오를 다지며 조국의 모순을 떨쳐내려던 고르바초프와 같은 용자의 출현을 세계는 학수고대하고 있다.

고세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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