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듣고싶은 설교] 어디서든 겸손하고 끈기 있게… 중보기도의 세가지 조건







“여호와께서 또 이르시되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고 그 죄악이 심히 무거우니 내가 이제 내려가서 그 모든 행한 것이 과연 내게 들린 부르짖음과 같은지 그렇지 않은지 내가 보고 알려 하노라 그 사람들이 거기서 떠나 소돔으로 향하여 가고 아브라함은 여호와 앞에 그대로 섰더니 아브라함이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려 하시나이까 그 성 중에 의인 오십 명이 있을지라도 주께서 그 곳을 멸하시고 그 오십 의인을 위하여 용서하지 아니하시리이까 주께서 이같이 하사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이심은 부당하오며 의인과 악인을 같이 하심도 부당하니이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정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만일 소돔 성읍 가운데에서 의인 오십 명을 찾으면 그들을 위하여 온 지역을 용서하리라 아브라함이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티끌이나 재와 같사오나 감히 주께 아뢰나이다 오십 의인 중에 오 명이 부족하다면 그 오 명이 부족함으로 말미암아 온 성읍을 멸하시리이까 이르시되 내가 거기서 사십오 명을 찾으면 멸하지 아니하리라 아브라함이 또 아뢰어 이르되 거기서 사십 명을 찾으시면 어찌 하려 하시나이까 이르시되 사십 명으로 말미암아 멸하지 아니하리라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 주여 노하지 마시옵고 말씀하게 하옵소서 거기서 삼십 명을 찾으시면 어찌 하려 하시나이까 이르시되 내가 거기서 삼십 명을 찾으면 그리하지 아니하리라 아브라함이 또 이르되 내가 감히 내 주께 아뢰나이다 거기서 이십 명을 찾으시면 어찌 하려 하시나이까 이르시되 내가 이십 명으로 말미암아 그리하지 아니하리라 아브라함이 또 이르되 주는 노하지 마옵소서 내가 이번만 더 아뢰리이다 거기서 십 명을 찾으시면 어찌 하려 하시나이까 이르시되 내가 십 명으로 말미암아 멸하지 아니하리라 여호와께서 아브라함과 말씀을 마치시고 가시니 아브라함도 자기 곳으로 돌아갔더라”(창18:20-33)

중보기도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중보기도는 나하고 별로 상관없는 것으로 여기거나 또는 나는 중보기도자의 사명이 없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는 잘못된 생각입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이신 예수님을 따라 우리도 세상과 영혼들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내용으로 또 어떠한 자세로 중보기도를 해야 할까요? 오늘 본문 속 아브라함에게서 그 길을 찾을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소돔 땅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소돔 땅은 성적으로 타락한 문란한 도시였는데 창세기 19장을 보면 당시 소돔 땅이 성적으로 얼마나 타락했는지를 엿볼 수 있습니다. 그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 땅을 심판하시기로 하십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그 죄악으로 가득 한 소돔 땅을 위해 기도합니다. 왜냐하면 바로 그 땅에 조카 롯이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롯에 대한 애정이 죄악으로 가득 찬 땅을 위한 기도를 불러일으킨 것입니다. 이것은 중보기도가 한 영혼에 대한 사랑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아브라함은 조카 롯에 대한 애정으로 기도를 시작했지만, 그것에만 그치지 않고 소돔과 고모라 땅 전체를 놓고 기도했다는 사실입니다. 아브라함은 그 땅에 의인 열 명이 있다면 롯만 구원해 달라고 하지 않고, 그 땅 전체를 멸하지 말아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땅과 그곳에 살고 있는 영혼들을 위해 중보 기도한 것입니다.

우리는 영혼구원을 위해서 중보기도 해야 합니다. 나의 가족들이, 또 이웃들이 내가 알고 지내는 모든 영혼들이 구원받을 수 있도록 그들을 위해서, 또 그들이 살고 있는 그 땅을 위해서 중보 기도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에게 세 가지가 필요합니다.

첫째, 겸손함으로 주님 앞에 엎드려 기도해야 합니다. 중보기도의 주권은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지금 아브라함이 소돔과 고모라 땅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지만 하나님께서 먼저 그에게 찾아와 그 땅을 위해서 기도하도록 하셨기 때문에 그가 기도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될 것이 아니냐”(창18:17-18)

기도는 하나님께서 시작하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중보기도 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렇기에 아브라함은 자신이 티끌, 재와 같다고 고백하며 겸손히 하나님 앞에 엎드린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드린 기도의 응답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맡깁니다.

“나는 티끌이나 재와 같사오나 감히 주께 아뢰나이다”(창18:27)

아브라함은 자신을 의지하여 기도하지 않고 자비와 공의의 하나님을 붙잡고 기도했습니다. 이처럼 우리 역시 중보기도 할 때,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겸손하게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둘째, 끈기 있게 기도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의인의 숫자를 50명에서 10명까지 무려 여섯 번이나 줄여가며 기도했습니다. 또한 계속해서 하나님께 노하지 마시고 응답해달라고 간청합니다. 그만큼 그는 간절하게 기도한 것입니다, 놀라운 사실은 아브라함이 드린 여섯 번의 기도에 하나님께는 매번 응답하셨다는 것입니다. 영혼 구원을 위해서 간절히 드리는 우리의 중보기도에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응답하십니다. 우리가 끈기 있게 기도할 때 응답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기적을 경험하기를 소망합니다.

셋째, 어디서든 기도해야 합니다. 22절을 보면 “그 사람들이 거기서 떠나 소돔으로 향하여 가고 아브라함은 여호와 앞에 그대로 섰더니”라고 되어 있는데 여기서 아브라함이 그대로 선 그곳은 16절에 소돔과 고모라를 향하여 떠나는 천사들을 배웅하러 나간 그 자리입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은 그 길 위에서 기도한 것입니다. 천사들을 배웅한 바로 그 자리에 그대로 서서 그 땅을 위해서 하나님께 기도한 것입니다. 이러한 기도의 모습은 아브라함 뿐 아니라 성경의 많은 인물들을 통해서도 볼 수 있습니다. 엘리야는 산에서 기도했고 다니엘은 집에서 창을 열고 예루살렘 성전을 향해서 기도했습니다. 베드로는 지붕 위 다락방에 올라가서 기도했으며 심지어 요나는 요란한 물고기 뱃속에서도 기도했습니다.

이것은 우리 삶 속에서 어디서든 기도해야 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교회에서도 기도하고 일터에서도 기도해야 합니다. 특별히 성령이 처음 임했던 장소가 한 가정의 다락방이었다는 것은 우리의 가정을 기도의 처소로 삼는 것도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보여 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서 있는 모든 자리에서 영혼 구원을 위해서 겸손함으로 끈질기게 구하는 중보기도에 반드시 응답해 주십니다. 의인 열 명이 없었던 소돔과 고모라는 멸망했지만 롯은 구원을 받았다는 사실이 이를 잘 보여줍니다.

“하나님이 그 지역의 성을 멸하실 때 곧 롯이 거주하는 성을 엎으실 때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보내셨더라”(창19:29)

아브라함은 중보기도를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더욱 깊어졌습니다. 하나님과 깊은 영적 교제를 누린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실 일이 무엇인지를 깨달았고 그 일에 하나님과 함께 아파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 사역에 기도로 동역하는 놀라운 복을 누렸던 것입니다.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망하기로 정하여 재가 되게 하사 후세에 경건하지 아니할 자들에게 본을 삼으셨으며”(벧 2:6)

소돔과 고모라의 과거는 과거로 끝난 것이 아닙니다. 타락한 세상을 하나님께서 결코 간과하시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시대의 아브라함과 같은 중보기도자로 서야 합니다. 내가 서 있는 자리에서 영혼구원을 위해서 끈기 있게 기도하고 하나님의 응답을 경험해서 놀라운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동참하는 복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황덕영 새중앙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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