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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에서 부활의 삶을 살려면





표도르 도스토옙스키는 ‘죄와 벌’에서 노파를 죽인 범인에게 하숙집 소녀가 이 말씀을 읽어줄 때 그의 양심이 살아났다고 묘사했습니다.

“네 오라버니가 다시 살아날 것이다.”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자 마르다는 “마지막 날 부활 때에 그가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은 내가 압니다”라고 말합니다. 예수께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살고, 살아서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아니할 것이다. 네가 이것을 믿느냐?”하고 물으셨습니다.

도스토옙스키에게 부활이란 사후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새로운 삶의 시작이었습니다.

대문호 레프 톨스토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톨스토이가 인생 마지막에 모든 것을 바쳐 쓴 소설이 ‘부활’입니다. 진정한 부활을 모색한 작품입니다.

부유한 가문의 아들로 태어난 네흘류도프 공작은 부족할 것 없는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네흘류도프는 복음을 듣게 되었고, 그 복음이 자신의 내면에서 꿈틀거리기 시작합니다. 네흘류도프는 우선 카츄샤라는 술집 여자의 억울한 사연을 풀어주는 데 자신의 돈과 시간을 바칩니다. 누가 보더라도 상관없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하층민 여인을 지고지순하게 사랑하며 그녀의 새로운 삶을 위해 헌신하는 네흘류도프는 톨스토이가 말하고자 하는 부활이 무엇인지 암시합니다.

카츄샤의 새로운 삶을 위해 헌신하는 네흘류도프는 동시에 자신의 영지에서 일하는 소작농들을 불러모아 땅을 나눠주기 시작합니다. 그는 모든 가난의 문제가 땅을 가지지 못한 것에서 비롯됐음을 보았고, 자신의 땅을 나눠줌으로 소작농들이 새로운 삶을 살기를 원했습니다. 네흘류도프가 이런 결단을 한 배경으로 톨스토이는 산상설교를 제시합니다. 네흘류도프는 산상설교에서 예수께서 가르친 삶은 단순한 이상이나 윤리가 아니라 실제로 살아낼 수 있는 삶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할 때 예수께서 가르친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할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톨스토이의 주인공 네흘류도프가 행한 두 가지 일은 곧 톨스토이 자신의 고백입니다. 그는 복음서를 진지하게 읽었고 체화했고 살아내려 했습니다. 그것이 톨스토이가 이해한 부활의 핵심이었습니다. 부활이란 이 땅에서 온갖 것을 누리다 죽어서 천국에 올라가 더 좋은 것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며 새롭게 살아가는 삶이었습니다. 지금 여기서 변화되는 말씀의 삶이 곧 부활입니다.

‘부활’을 읽으며 어떻게 살아야 할까 깊이 고민합니다. 네흘류도프처럼, 톨스토이처럼 할 수는 없을지라도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삶, 이 땅에서 살지만 천국 시민으로 살아가는 삶, 잠시 거류하는 외국인으로 살아가는 삶, 내 것을 나눠주며 이웃을 사랑하는 삶, 그런 부활의 삶을 살자고 다짐해 봅니다.

김양현 목사 (‘영화로 보는 세상’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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