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예수] 전도지 넣고 다니는 ‘열혈성도’… “핍박 받더라도 예수님 전할 것”

경기도 성남시 분당의 엘씨드센터에서 지난달 만난 이옥련 권사. 그는 “예수님 믿고 오늘까지 전도인으로 살았다”면서 “예수님을 믿지 않는 영혼들이 너무 불쌍해 견딜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엘씨드센터는 의료사고로 장애를 입고 20년을 가족과 함께하다 먼저 하나님 품으로 떠난 아들 사무엘을 기억하며 2014년 설립됐다. 성남=신석현 포토그래퍼
 
이옥련(앞줄 맨 오른쪽) 권사와 가족들이 지난달 분당의 한 백화점 앞에서 전도 모임을 갖고 있다.


여름 더위가 가신 지난달 24일 경기도 성남시 분당의 한 대형 백화점 앞 광장. 어린아이부터 할머니 할아버지까지 10여명이 모여 분주히 전도지를 돌리고 있었다. 장애인 특수교육 전문 엘씨드센터 이사장 이옥련(73) 권사와 두 여동생의 가족들이다. 각자 사는 곳에서 꾸준히 전도를 해왔지만 온 가족이 한번 뭉쳐보자는 생각에 처음 모였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라는 말씀이 적힌 팻말도 들었다.

거리의 사람들은 질문한다. “교회도 전도하나요? 난 이단인 줄 알았네요”라고. 이 권사는 “이단들은 여전히 거리에서 열심히 자신들이 진리라고 외치지만 크리스천은 전도의 사명을 잃고 있다”면서 “너무나 아픈 질문이었다”고 했다. 그는 “예수님 믿고 오늘까지 전도인으로 살았다”면서 “크리스천이라면 예수 그리스도를 전해야 한다”고 말했다.
 
패역한 삶 가운데 하나님께 무릎 꿇다

캐나다 그레이스한인교회에서 권사 직분을 받고 현재 양재온누리교회에 출석하는 이 권사는 작정하고 전도하는 날뿐만 아니라 평상시에도 직접 제작한 전도 책자를 가방에 넣고 다닌다. 전도를 사명으로 삼은 이 권사의 모습은 30여년 전만 해도 상상도 못 했던 일이다.

이 권사는 다섯 살 때부터 어머니 손을 잡고 교회에 다녔다. 어머니는 신앙의 독실함 만큼이나 숨이 막힐 정도로 철저한 신앙생활을 강요하셨다. 주일과 수요예배는 빼놓지 않았고 찬양대 활동도 했다. 이 권사는 “다들 신앙생활에 열심이라고 했지만 나는 지치고 교회가 싫었다”면서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마음에는 예수님이 없었다”고 고백했다.

미혼 때엔 결혼과 동시에 어머니한테도 떠나고 교회와도 작별할 것이라고 다짐했었다. 실제로 1974년 결혼과 동시에 교회를 떠났다. 당시 이 권사는 ‘내가 주인이 돼 멋진 삶을 살겠다’고 생각했다.

자유와 행복의 시간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76년 태어난 큰아들 사무엘이 생후 6개월 무렵 의료 사고로 혼자서는 움직일 수 없는 장애를 입었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그래도 그의 완악함은 꺾이지 않았다. 이 권사는 “하나님, 제가 뭘 그렇게 잘못했느냐”고 소리쳤다. 하지만 하나님께 반항하면 할수록 시련과 고통은 커졌다.

그러던 어느 날, ‘새벽 기도를 가야 하겠다. 이렇게 해서는 내가 살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하나님께 무릎을 꿇고, 교회에 나가 새벽 기도를 시작했다. 이 권사는 “그때도 예수님이 좋고 싫고 그런 생각이 없었다. 그냥 내가 살기 위해서였다”고 말했다.
 
평생 잊지 못하는 그날

1986년 6월 22일. 그날도 새벽 기도를 갔다 집으로 돌아왔다. 아들이 고열이었지만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오늘은 꼭 받고야 말겠어.” 걸레질을 하면서 계속 중얼거렸다. ‘오늘은 하나님하고 담판을 짓고 말겠다’고 생각하면서 무릎을 꿇었다. “하나님 오늘 저 좀 만나주십시오. 안 만나주시겠으면 저를 데려가세요.” 결혼 때 가져온 두꺼운 이불을 뒤집어쓰고 통곡했다. 때로는 애걸하고 때로는 투정하고 반항했다. 어느 순간부터 이 권사는 하나님께 회개하고 있었다. ‘예수님 믿지 않는 집에 시집갔던 일’ ‘신줏단지에, 제사상에 절하라고 할 때 절했던 일’ 등이 스쳤다. 이 권사는 “그럴 때 하나님 얼마나 마음이 아프셨냐, 제가 죄인”이라고 울부짖으며 뒹굴었다.

한참을 기도하는데 갑자기 방언이 터져나왔다. 그리고 어느 순간 잠잠해지더니 마음에 평안이 밀려왔다. 그제야 누워있던 아들을 쳐다봤다. 아들도 해같이 밝아져 편하게 누워 있었다. 사실 그때 하나님께서 아들을 고쳐주신 줄 알았다. 이 권사는 “문을 여는데 어둠에서 빛의 세계로 나가는 것 같았다”며 “산천이 하나님을 찬양했고, 그 기쁨을 온전히 누렸다”고 했다.
 
남편의 회심 그리고 성령의 은혜로 날마다 잔치

남편 김대두 전 STX그룹 부회장은 가정의 환란이 깊어질수록 더더욱 회사 일에만 몰두했다. 당시는 현대중공업에 다니던 시절이었다. 다시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한 이 권사는 남편에게 “교회에 같이 가자”고 말했고, 남편은 아내의 뜻을 따라 예배만 참석했다.

85년 겨울, 출석하던 울산의 한 교회 여성 집사 6명이 모여 기도 모임을 했을 때였다. 처음에는 집마다 돌아가면서 모임을 하다 이웃에 소음 피해를 줄까 봐 밤에 산기도를 드렸다. 30대 중반도 안되는 여성들이어서 남편들은 처음에 보디가드 역할로 참여했다가 나중에는 기도에 동참했다. 산기도를 통해 영적으로 다들 뜨거워졌다. 이듬해 부흥회를 인도하는 목사님이 “이제 세상의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하나님 앞에 결단할 사람 손 들고나와라”고 할 때 남편이 손을 들고 나갔다.

이 권사가 성령 체험을 하고 남편도 신앙인으로 거듭나면서 집안에는 성령의 바람이 불었다. 아들은 전에도 예쁘고 귀했지만 믿음 안에서 바라보니 더더욱 예쁘고 귀하게 보였다. 온 가족이 매일 집에서 예배를 드리니 날마다 천국 잔치였다. 이 권사는 “하나님과의 만남은 사람을 송두리째 변화시킨다”고 말했다.
 
제2의 인생, 오직 전도, 전도

아들의 병은 차도가 없고 환경도 변한 것은 없지만 솟구치는 기쁨은 제2의 인생을 시작하게 했다. 이 권사는 성경 말씀만 들고 모르는 사람 집의 문을 두드렸다. 사람이 모여있는 데는 어디든, 시위하는 곳에라도 뛰어 들어갔다. 심지어 승려들에게도 전도지를 돌리고 복음을 전했다. 이 권사는 “예수님을 만난 뒤 잠시 왔다 가는 이 세상이 끝나면 영원한 세상에서 우리 하나님께서 나를 기다리고 계신다는 것을 받아들였다”면서 “이 복음이 얼마나 귀중한지 모르는 영혼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영혼들이 너무 불쌍해 견딜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지구촌사랑나눔(대표 김해성 목사)의 ‘외국인 노동자 무료 전용 의원’을 찾는 외국인 환자에게 5년 정도 전도를 하기도 했다. 당시 만난 우즈베키스탄의 미샤(가명)는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고국에서 회계사였던 미샤는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말에 직장과 가정을 팽개치고 한국에 왔다. 이내 불법체류자 신분으로 전락한 뒤 오토바이 사고로 병원에 입원했을 때 이 권사에게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했다.

최근 미샤는 이 권사의 시집 ‘빗나간 1초’의 출판기념회를 찾아 편지 한 장을 건넸다. 무슬림이었던 미샤는 가족과 조국으로부터 버림받았다. 하지만 그는 고백했다. “저는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잃은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얻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우리 부모, 형제, 저를 버린 아내와 자식들, 지인들 아니 우즈베키스탄의 모든 민족이 구원받는 그 날을 위해 기도합니다.”
 
사무엘의 죽음과 엘씨드의 탄생

97년 1월 가족의 전부였던 아들 사무엘이 세상을 떠났다. 이 권사는 기도했다. “방금 하나님 아들이 하나님 나라에 갔습니다. 20년 동안 저에게 맡겨주셨었고 그 아들과 많이 사랑하게 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하나님, 받아주시고 다음에 우리가 만나겠습니다.”

장례를 치르고 와서 남편이 “이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고 혼잣말을 했다. 이 권사는 “하나님께서 사무엘 같은 장애 아이들을 돌보며 살라고 하시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리고 17년이 흐른 뒤 엘씨드센터가 설립됐다. 엘씨드가 만들어지기까지 특수교육을 전공한 이 권사 두 딸의 역할이 컸다. 이 권사는 “하나님은 두 딸에게 아무리 힘들어도 동생, 오빠를 돌보는 예쁜 마음을 주셨다”면서 “온 가족이 장애인을 위해 헌신하는 사명을 주신 것에 감사할 따름”이라고 말했다.
 
전도의 사명 잃은 크리스천

이 권사가 거리에서 전도하다 보면 가장 냉정하게 뿌리치는 사람들은 대부분 ‘크리스천’이라고 한다. “교회 다녀요”라고 하면서 싸늘한 눈빛을 보낸다. 그때마다 잠시 거주하던 캐나다에서 전도할 때 만났던 캐나다 할머니의 모습이 잊히지 않는다. 밴쿠버에서 빅토리아로 향하던 배 안에서 그 할머니가 전도지를 돌리는 아시아 이방인을 꼭 끌어안고 한 말은 “아임 크리스천(I’m Christian)”이었다. 크리스천 자매의 사랑이 느껴졌다고 한다.

요즘 많은 크리스천은 위로받고 싶어서, 영혼의 평안을 누리고 싶어서 교회에 간다. 하지만 믿지 않는 영혼의 구원에 대한 관심은 사라지고 있다. “세상에서 고난과 핍박을 받더라도 예수님을 전하겠다”는 이 권사의 사명이 더더욱 귀한 때다.

성남=맹경환 선임기자 khmae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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