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유이상 (11) 생후 22개월, 내게 신앙 주고 떠난 첫 아들 희웅이

유이상(왼쪽) 대표가 1990년 캐나다 여행 당시 아내와 함께 찍은 기념사진. 온 가족이 함께한 이 여행을 통해 그는 돈이 행복의 충분조건이 될 수 없음을 깨달았다.


1978년 3월 풍년기업사를 개업하고 그 이듬해 사랑스러운 딸 세인이를 낳았다. 30대 초반 가장의 삶에 본격적인 시작을 맞은 것이다. 아내는 나의 그 시절을 ‘무던히 열심히 살면서 항상 뛰어다녀서 구두 뒤축이 다 닳았던 때’로 기억한다.

부족한 돈으로 사업을 하느라 정신없이 바쁘게 지냈다. 새벽에 나가면 한밤중에 들어오는 일이 예사였다. 눈앞의 일과 돈을 좇느라 주변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온 정신이 사업에만 팔려있었다. 아내는 집안 살림에 육아까지 모두 짊어진 채 묵묵히 내조를 했다.

어느 날 아내가 말했다. “희웅이가 감기에 걸린 것 같아요.” 대수롭지 않게 들었다. ‘애들이 자라면서 감기도 좀 걸리고 그러는 거지’ 싶었다. 아무래도 이상한 낌새가 들었는지 아내는 아들을 데리고 동네 소아과로 달려갔다. “얼른 큰 병원에 가보십시오.”

아들은 급히 신촌세브란스병원으로 옮겨졌다. 걷잡을 수 없이 상태가 나빠졌고 인공호흡기에 의지해 겨우 숨을 붙이고 있었다. 의사는 알아듣기도 힘든 병명을 말하며 뇌에 바이러스가 침투해 기능 장애가 왔다고 설명했다. “생존 확률이 거의 없습니다.”

희웅이는 증세가 나타난 지 24시간이 채 되지 않아 숨을 거뒀다. 생후 22개월 만이었다. 형님과 친구들이 희웅이의 마지막 가는 길을 수습했다. 아내와 함께 삽교천 방조제에 앉아 서로를 부둥켜안고 한없이 울었다.

일찍 부모를 떠나 서울에서 혼자 객지 생활을 하면서 집 없고 배고픈 나날들을 많이 겪었지만 눈물을 흘린 적은 없었던 나였다. 아내의 어깨를 다독이며 쉬이 멈추지 않는 눈물을 삼키고 또 삼켰다. 태어나 가장 많은 눈물을 흘린 그 날, 아이를 잃고 나서야 내가 부모임을 절절하게 깨달았다. 아내와 아이들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하나님께서 내 가슴에 새겨준 사건이었다.

첫아들 희웅이는 짧은 시간 내 곁에 있었지만 가장 중요한 아들 노릇을 하고 갔다. 내게 신앙을 주고 간 것이다. 아들을 잃은 뒤 나는 오늘을 살고 있지만 내 생명이 영원하지 않음을 알게 됐다. 그래서 신앙에 관심이 생긴 것이다. 아들을 잃은 아픔을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얼마 후 아들을 선물로 주셨다. 당시 출석하던 교회 목사님께선 우리 아들에게 성은(成恩)이란 이름을 지어주셨다.

우리 가족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여행’을 묻는다면 아마도 1991년 캐나다를 떠올릴 것이다. 사실 당시 형편이 좋지 않아 혼자 가기도 힘든 상황이었지만 무리를 해서라도 가족 모두가 함께 가는 것으로 신청을 했다. 한국기독실업인회(CBMC) 회원들과 동행하는 일정이었는데 알고 보니 전체 40여명 중 자녀와 함께한 가족은 우리를 포함한 네 가정뿐이었다.

대형버스를 타고 2000㎞ 정도를 여행했는데 버스 안에서 회원들의 간증이 이어졌다. 그중 평창동 저택에 살며 모든 가족이 자가용을 소유하고 있던 부유한 가정이 있었다. “허름한 단칸방에 살아도 우리 가족만의 삶을 살아 보는 게 소원이에요.” 마이크만 잡으면 눈물을 쏟아내 말을 잇지 못하는 그 부인의 모습을 보며 돈이 행복의 충분조건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다.

정리=최기영 기자 ky710@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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