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최성권 (9) 선교 열정 충만한 여동생, 남편과 함께 인도서 개척사역

인도 델리에서 사역을 하는 최성권 선교사의 여동생 부부가 현지 성도들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담임 목사님과 침례신학대학교 총장님이 나눈 가벼운 차 안 대화는 나에게 큰 기대감을 갖게 했다. 일주일 이내에 신학대학교의 전기 담당자와 사무처장이 함께 모이는 전기절감 회의로 이어졌다. 매달 3000만원 정도의 전기료를 내야 하는 형편인데 8%만 절감이 된다고 해도 결코 적은 돈이 아니었다. 그런데 막상 설치하기에는 예산이 문제였다. 분명히 이 정도의 장비라면 수천만원의 예산 편성이 이뤄져야 집행을 할 수 있는 일인데, 준비조차 되지 않았기에 학교 측에서도 망설이는 눈치였다. 그래서 내가 제안을 했다. “뭘 걱정하십니까? 앞으로 일정 기간 절감되는 금액에서 반은 학교에서 유익하게 사용하시고 반만 저희 회사로 돌려주시면 되는데요.” 예산 담당자도 전기 실장도 여기까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한 일이기에 그저 놀란 표정만 짓는 것이었다. 나는 이때부터 우리 사업이 곧 선교의 통로가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하나님은 여동생에게도 선교의 길을 여셨다. 두 살 아래의 여동생은 고신대 2학년 때부터 예수전도단 훈련에 참석할 정도로 선교에 대한 열정으로 충만했다. 신학생 시절에 제주도 훈련을 받고 난 다음 매년 스리랑카로 단기 선교를 다녀왔고 졸업을 하고서도 6년 동안이나 선교지에 머무르며 처녀 선교사의 사명을 다했다. 서른 살이나 된 딸이 시집갈 생각은 하지 않고 저렇게 돌아다닌다고 아버지는 애꿎게 어머니를 핍박했다. 모두 예수에 미쳐 저렇게 됐다는 생각에서였다.

이런 가운데 어머니는 여동생을 목회자한테 시집 보내려는 생각으로 선볼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 어머니에게 여동생 선 자리가 들어왔다. 지금 선교사는 아니지만, 사업가로서 선교의 꿈을 키우는 사람이라고 했다. 여동생은 그 사람과 선을 봤고 결혼까지 했다.

한 번은 여동생이 남편과 선교를 하러 인도로 간 적이 있다. 델리에서 시작된 개척사역은 활발하게 이뤄졌다. 사람들을 전도해서 교회를 이루면 현지인을 양육시켜 목회를 맡겼다. 이렇게 사역을 이어가니 인도에 간 시간이 어느새 20년이 됐다. 지금 여동생의 남편은 신학과정을 거쳐 어엿한 선교사가 됐다. 그리고 여동생 부부 선교사는 인도 중부의 비사카 파트남이라는 곳에서 교회를 설립, 목회와 신학교 운영을 동시에 하고 있다.

인도에서는 교회 단독 건물을 지을 수 없고, 십자가를 세울 수도 없기에 YMCA 건물을 사용하고 있단다. YMCA 건물 내에 예배실을 마련해 현지인 예배와 영어 예배 그리고 어린이 주일학교까지 이끌고 있다. 영어 예배는 경제적으로 상위층에 속한 사람들로 구성돼 있다고 하는데 특이한 건 현지인들을 가정 예배로 연결해 교육을 시키고 현지인 목회자로 양육한다는 것이다.

더 놀라운 점은 정상적인 과정을 거쳐 현지인 목회자가 탄생하면 그가 고향으로 가서 목회할 경우 염소 12마리를 줘서 파송시키는 제도다. 이것만 있으면 일상생활이 가능한 데다 추후 성공적인 목회를 이루게 되면 12마리 염소는 갚도록 했다. 이러한 딸과 사위 선교사의 생활을 부모님이 직접 가서 경험하도록 내가 경비를 지원해 여행을 주선하기도 했다.

정리=최경식 기자 kschoi@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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