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김영걸 (1) 우리가족 믿음의 뿌리 할머니, 신앙의 자유 찾아 월남

경북 영양군 영양읍교회 성도들이 1963년 교회에서 단체 사진을 찍고 있다. 앞줄 어린아이가 김영걸 목사, 김 목사 오른쪽과 왼쪽이 할머니 안 초순 전도사와 아버지 김충효 목사.


내가 태어난 곳은 경상북도 영양군 영양읍 서부리다. 정확히 말하면 영양읍교회 전도사 사택에서 태어났다. 영양은 지금도 군 자립도가 가장 낮은 곳 중 하나이니 1950~60년대는 말할 것도 없었다. 산골 중의 산골이라 할 수 있었다. 당시 할머니는 영양읍교회 전도사였고, 아버지는 신학생이었다. 아버지가 사택에서 살고 계실 때 내가 태어났다.

그래서 우리 가족을 설명하려면 할머니 이야기부터 시작해야 한다. 우리 가족은 증조할아버지가 한의사였고, 할아버지는 목재 사업을 하시면서 함경북도에선 부유한 기독교 집안이었다. 증조할아버지 때부터 예수를 믿었지만, 실제적인 믿음의 뿌리는 할머니로부터 시작됐다. 할머니 안초순 전도사는 함경북도 신포에서 전도사로 교회를 섬겼다. 학창 시절 복음을 받아들이면서 집사로 교회를 섬겼다. 처음에는 문호리교회를 섬기다가 후에 신포읍교회로 옮기셨다. 할머니는 신앙생활에 최선을 다하셨다. 말씀을 거의 외우다시피 했고, 기도를 신령하게 잘하시는 분이셨다.

그러다 45년 해방 후 북한 땅에 공산정권이 들어서면서 신앙의 제약을 받게 됐고, 온 가족이 신앙의 자유를 찾아 월남했다. 남쪽으로 먼저 내려갈 결심을 한 분은 사업을 하던 둘째 작은할아버지였다. 작은할아버지는 배를 타고 월남하기 전 형수인 할머니를 찾았다고 한다. “형수님, 기도하시는 전도사님이 함께 가 주세요. 불안해서 갈 수가 없습니다”라는 부탁을 하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할머니는 작은할아버지 가족과 동행해 남쪽으로 오게 됐다. 가족을 이북에 두고, 먼저 배를 타고 월남하신 때가 46년이었다. 그리고 할머니는 고향인 북으로 다시는 돌아가지 못했다.

월남한 할머니는 강원도 삼척시 도계로 가셨다. 그 당시 도계는 일자리도 많고, 사람도 많은 큰 도시였다. 할머니는 도계감리교회 전도사로 계셨다. 할머니는 기도와 전도를 잘하는 분이셨고, 교회도 부흥했다고 한다. 당시에 도계에는 감리교회뿐이었는데 함흥에서 내려온 장로교인들이 중심이 돼 장로교회도 세워졌다. 이때 할머니가 예배를 인도하셨다. 그 교회는 지금의 도계장로교회(길지훈 목사)로 이어지고 있다.

아버지는 북에서 할머니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다가 홀로 남쪽으로 오셨다. 이때 아버지 나이가 18세였다. 기차를 타기도 하고, 걷기도 하면서 남으로 내려오셨다고 한다. 지금의 양주 근처에서 임진강을 헤엄쳐 건너기도 하셨다. 나는 아버지가 월남하면서 있었던 이야기를 어려서부터 늘 한 편의 드라마처럼 들으면서 자랐다. 이렇게 우리 가족은 마치 아브라함이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왔듯이 고향을 떠나 남쪽에서 나그네 삶을 살게 됐다.

약력=충남대 지질학과, 평택대(구 피어선신학교) 신학과, 장신대 신대원(교역학 석사), 숭실대 통일정책대학원(정치학 석사), 장신대 목회신학대학원 목회신학박사 수료,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총회 부서기, 포항시 기독교연합회장, 성시화운동본부 대표본부장, 현 포항동부교회 위임목사, 한국기독교연합회관 이사장.

정리=박용미 기자 me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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