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김영걸 (2) 월남 후 3년 만에 기적적으로 만난 아버지와 할머니

김영걸 목사의 할머니 안초순 전도사(두 번째 줄 오른쪽 다섯 번째)가 1950년 강원도 도계장로교회에서 성도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따로 남한에 내려온 할머니 안초순 전도사와 내 아버지가 만난 건 하나님의 은혜로밖에는 설명할 수 없다.

할머니는 월남 후 강원도 도계장로교회에 계시면서 장날이면 노방전도를 하셨다고 한다. 특히 도계역 앞에 선 채 기차에서 내리는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셨다.

혼자 월남한 아버지는 서울로 가셨다. 곳곳을 돌아다니며 함경도에서 온 사람들을 찾아 이런저런 소식을 물어보다가 강원도 도계에도 함경도 출신들이 있다는 말을 듣게 됐다. 그 이야기를 들은 아버지는 무턱대고 강원도 도계를 찾아가셨다.

기차를 타고 도계역에 내린 아버지는 어디로 가야 하는지 막막하셨다고 한다. 그러던 중 역 앞에서 아주 익숙한 사람을 보게 된다. 전도하다가 잠시 쉬고 있는 할머니였다. 함경도 신포에서 각자 월남한 어머니와 아들이 이렇게 강원도 도계역에서 기적적으로 만난 것이다. 두 분이 헤어진 지 3년 만이었다.

할머니는 아버지를 만나자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가 올 줄 알았다. 기도하는데 하나님께서 네가 올 거라고 알려주시더라.” 교회 성도들은 할머니가 좋은 일을 많이 하고, 기도도 열심히 해서 하나님이 아들도 만나게 해주셨다며 자기 일처럼 기뻐했다고 한다.

그 후 할머니와 아버지가 경북 예천 용궁교회(현 풍성한교회)로 가셨을 때 아버지는 그곳에서 내 어머니를 만나셨다. 외가 쪽은 용궁교회의 뿌리가 되는 집안이었다. 외할머니 이귀조 권사는 선교사가 이 지역에 찾아왔을 때 그를 대접하고 잠자리를 내어주셨다고 한다. 이런 외할머니의 섬김으로 용궁교회가 시작됐다.

외할머니는 슬하에 5남 4녀를 두었는데 우리 어머니는 전체로는 셋째였고, 여자로는 둘째 딸이었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용궁교회에서 만났고 이후 할머니가 영양읍교회로 옮기셨을 때 결혼했다. 그래서 온 가족이 영양읍교회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됐다. 함경도에 살던 아버지는 이제 경상도를 새로운 삶의 터전으로 삼고 살아가게 되신 것이다.

외할머니는 처음에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결혼을 반대하셨다고 한다. 약혼식 때는 참석하지도 않으셨다. 귀하게 키운 딸이 가난한 여전도사 아들과 결혼한다고 하니 부모 입장에서 얼마나 마음이 힘들었을지 충분히 이해가 간다. 그러나 결국 마음이 열리셔서 부모님은 양가의 축복 속에 결혼식을 올릴 수 있었다.

어릴 때 나는 용궁교회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바닷속에 있는 교회인 줄 알았다. 8명이나 되는 외가 쪽 어른들의 이름과 숫자를 외우는 데도 애를 먹었다. 외가 친척들은 사람도 많고, 행사도 많아서 모이면 늘 시끌시끌한 분위기였다. 반면 친가는 사람이 적어 외롭고 쓸쓸한 분위기였다.

그런데도 나는 할머니를 생각하면 아직도 가슴이 설렌다. 할머니가 교회 바닥에 엎드려 눈물로 기도하던 모습이 눈앞에 선하고, 그 울음 섞인 목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듯하다. 우리 가족과 많은 성도를 위한 기도였을 것이다.

할머니는 1960년 초에 경기도 광주 가나안농군학교로 가셨다. 가나안농군학교를 설립한 김용기 장로님의 부탁으로 농군학교 내에 있는 가나안교회 전도사로 섬기셨고, 돌아가실 때까지 가나안교회에서 일생을 보내셨다.

정리=박용미 기자 me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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