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김영걸 (3) 쓰러진 손자 안고 눈물로 기도 “하나님 고쳐주세요”

김영걸 목사의 할머니 안초순 전도사(앞줄 오른쪽 세 번째)가 1977년 경기도 광주 가나안농군학교 안에 있는 가나안교회 장로 장립 예배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안 전도사 왼쪽은 가나안농군학교 대표 김용기 장로.


아버지와 어머니는 영양읍교회 사택에서 할머니와 함께 신혼 생활을 시작하셨다. 아버지는 두 달 정도 영양읍교회에 계시다가 근처 추파교회에 이어 진보교회 담임 전도사로 사역하셨다. 그리고 1960년 성서공회 직원으로 채용돼 서울로 가게 되셨다.

어머니는 아버지와 같이 서울에 올라가지 않으시고 나보다 두 살 많은 누나와 함께 영양읍교회에서 할머니를 모시고 살았다고 한다. 그러던 중 내가 태어났다.

내가 2살 때 일이다. 내 인생에 큰 영향을 끼친 사건이 일어났다. 잘 걸어 다니던 내가 어느 날 쓰러지더니 일어나지 못했다고 한다. 침을 맞아도 안 되고, 약을 먹어도 소용이 없었다. 당시 유행하던 소아마비에 걸린 것이다.

할머니는 어린 나를 끌어안고 “하나님 고쳐주세요. 첫 손자인데, 하나님께 바친다고 서원한 손자이니 하나님이 고쳐주셔야 합니다”라고 교회 바닥에서 눈물로 기도하셨다고 한다. 전도사 가정에 무슨 돈이 있었겠는가. 하나님 도움밖에는 의지할 게 없었던 것이다.

할머니가 소아마비로 쓰러진 손자를 안고, 예배당에서 눈물로 기도한다는 소문이 교회에 다 퍼졌다. 그러자 교회 여전도회 회원들이 돈을 모아 할머니에게 주면서 나를 데리고 병원에 가보라고 했다. 어머니는 나와 누나를 데리고 근처 안동이나 대구도 아닌 서울까지 가셨다. 어머니 나이 27세 때의 일이었다. 한 손엔 누나 손을 잡고, 등 뒤에는 나를 업고 그렇게 서울로 가셨다.

어떻게 그 어린 새댁이 서울까지 가게 됐는지 하나님의 은혜라는 생각이 든다. 심지어 어머니는 서울에 와서 어느 권사님의 도움을 받아 나를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시켰다. 돈도 없고, 능력도 없이 시골에서 가난하게 살던 전도사의 손자가 서울에서 제일이라는 세브란스병원에서 소아마비 치료를 받게 된 것이다. 그래서 나는 지금까지 별다른 후유증 없이 잘 걸어 다닐 수 있게 됐다.

초등학교 입학 전까지 보조기구를 다리에 차고 다녔던 기억도 난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다리가 휘거나 구부러지지 않았다. 영양읍교회 여전도회 회원들과 권사님들의 사랑이 오늘의 내가 있도록 해준 것이다.

지금도 여전도회에 가서 말씀을 전할 때면 종종 이 간증을 한다. “여러분의 사랑이 한 사람의 인생을 바꿨습니다.” 생생한 간증에 많은 이들이 은혜를 받는 것을 보게 된다.

어릴 때는 하나님이 어떻게 내 다리를 고쳐주셨을까 궁금해하기도 했다. 나중에 이 기적이 할머니와 부모님의 신앙고백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할머니와 부모님은 늘 나에게 이렇게 가르쳐 주었다. “네 다리는 하나님이 고쳐주신 것이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이 내 다리를 고쳐주셨다고 굳게 믿으며 성장했다.

할머니와 잠을 자면 할머니는 늘 내 약한 다리를 주물러 주셨다. 피가 잘 통해야 한다면서 다리를 주물러 주며 기도해주셨다. 그럴 때마다 나는 하나님과 할머니, 부모님의 사랑을 충만히 느꼈다. 지금도 내 다리를 주물러주면서 기도해주시던 할머니의 모습이 눈앞에 선하다.

정리=박용미 기자 mee@kmib.co.kr
 
트위터 페이스북 구글플러스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