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김영걸 (4) 가나안농군학교 섬기며 하나님 안에서 가족들 다시 모여

경기도 광주 가나안교회에서 사역한 김영걸 목사의 할머니 안초순 전도사(왼쪽)가 가나안농군학교를 세운 김용기 장로의 아내(오른쪽)와 함께 있는 모습.


할머니는 1962년 경기도 광주 가나안농군학교 안에 있는 가나안교회 전도사로 부임했다. 그 후 아버지도 가나안고아원 원목으로 사역하게 되면서 우리 가족들은 다시 함께 모여 살게 됐다.

할머니는 새벽기도가 생활이셨고 낮에는 심방을 다니셨다. 할머니가 새벽에 기도하러 나가면 나도 같이 깰 때가 있었다. “할머니, 무서워. 오늘은 가지 마”라며 조르는 나를 데리고 할머니는 새벽기도를 가셨다.

새벽예배 때 나는 할머니 옆에 누워 잠결에 성도들의 기도 소리를 들었다. 기도 소리는 예배당이란 공간에서 증폭돼 천사의 소리처럼 내 귓가에 들어왔다. 모두 가난하고 힘든 시절이었지만, 자기 자신을 위한 기도만 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성도들은 모두 예배당 바닥을 눈물로 적시며 교회를 위한 기도, 나라를 위한 기도를 했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이런 전통을 잃어버리는 것 같아 안타까운 생각이 든다.

새벽기도가 끝나면 가나안농군학교를 세운 김용기 장로님이 농군학교 학생들과 함께 달렸다. 이때 외쳤던 구호가 ‘개척정신’이다. 그 당시 우리 민족이 얼마나 힘들고 가난하게 살았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때에도 희망을 잃지 않고 우리는 열심히 달려왔다. 그때 어린 내 가슴에 새겨진 단어가 ‘개척정신’이다.

김 장로님에 대해 기억나는 이야기가 하나 더 있다. 김 장로님은 가을이면 첫 과일을 잘 거둬서 할머니께 가져왔다. 그리고 할머니 앞에 무릎을 꿇고 큰절을 올리며 “전도사님이 기도해 주셔서 올해도 풍년이 들었습니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그러면 할머니는 머리를 조아리고 기도드렸다. 비록 여전도사였지만 목회자에 대한 장로님의 존경과 사랑의 표현이었던 듯싶다.

김 장로님이 가시고 나면 할머니는 눈물을 흘리며 “장로님의 사랑 때문에 산다”고 했다. 그때는 무슨 말인지 이해를 못 했지만, 지금은 이해가 된다. 목회자와 장로 사이에 사랑과 존경이 있는 아름다운 관계가 그리워진다.

아버지가 사역하신 가나안고아원은 가나안농군학교 인근에 있었다. 어린 시절 고아원 아이들과 함께 놀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성탄절은 가장 신나는 날이었다. 미군 부대가 선물을 가지고 와 마당에 내려놓으면 나를 비롯한 아이들이 뛰어다니며 선물을 주웠다. 고아원에 있었어도 나는 미제 공과 학용품을 쓰고 미제 사탕을 먹으며 자랐다.

1960년대 초기는 모두가 어렵고 힘든 시절이었다. 전쟁고아도 많았고 굶어 죽는 사람도 있었다. 가나안농군학교가 있던 경기도 광주엔 벽돌공장이 많았다. 그곳의 흙이 점토질이었기 때문에 그 흙을 캐다가 벽돌로 구워냈다. 당시 가나안농군학교 주변은 개발되지 않은 야산인 데다 황무지였는데 지금은 아파트가 들어섰다.

가나안농군학교와 가나안교회, 가나안고아원 모두 기독교인들이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 위해 믿음으로 헌신한 발자취다. 그리고 내가 어릴 적 성장한 환경이요, 내가 본 풍경이다. 나는 믿음으로 헌신하는 사람들, 찬송하고 기도하는 사람들, 사랑으로 서로 돌보는 사람들, 희생하며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자랐다.

정리=박용미 기자 me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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