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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마당-전정희] 인생 길다



지난 10일 오후 충북 제천의병회관에선 근대 계몽사상가 탁사 최병헌 선생 탄생 160주년 기념 학술 세미나가 열렸다. 충북 제천 출신 최병헌은 성리학에 밝은 한학자였다. 그는 19세기 말 서세동점의 현실에 동도서기(東道西器)로 대응하는 조선 지식인들의 안목을 비판하고 동서양의 가치에 뿌리를 둔 대도대기(大道大器)의 문명개화를 주창했다. 그는 근대 계몽사상가이자 한국적 신학의 뿌리가 된 신학자로 서울 정동교회 2대 목사를 지내기도 했다.

제천시는 10여년 전부터 기념관 등을 지어 최병헌의 뜻을 기리고자 했다. 한데 뜻밖의 난관에 부닥쳤다. 갑오농민전쟁 때 고종의 명을 받들어 충남 일원에서 순무사를 했다는 기록 때문이었다. 제천 시민단체 일부가 순무사 이력이 ‘의병의 고장 제천’을 훼손한다고 보고 반대했다. 이날 세미나는 시민사회 합의를 도출해 나가는 과정이라고 보면 된다.

동요 ‘자전거’의 작사가 목일신 선생의 삶을 찾아 나섰던 지난 1월 전남 고흥군 고흥읍. 읍내 곳곳에 ‘박지성공설운동장’ 방향을 알리는 표지판이 눈에 띈다. 축구 스타 박지성은 초등학교 2학년 때까지 이곳에서 살았다. 고흥은 프로레슬러 김일, 세계 복싱 챔피언 유제두, 축구 국가대표 김태영 등 스포츠 스타가 많이 나왔다. 고흥군내 ‘김일기념체육관’은 공감할 수 있으나 ‘박지성공설운동장’ ‘김태영축구장’ 명칭은 불편하다. 각기 30대와 40대 살아 있는 사람에게 거대 공덕비를 세운 듯해서다. 박지성의 경우 경기도 수원과 화성을 잇는 ‘동탄지성로’가 있고, 조형물도 있다. 반면 고흥 출신으로 근대 어린이 음악에 기여한 목일신, 그의 아버지 독립운동가 목치숙 등은 상대적으로 뒷전이었다.

지방자치단체마다 유명인이나 스타를 활용한 관광 마케팅에 열성적이다. 때문에 ‘살아 있는 인물’을 도로 및 시설명, 동상으로 활용해 논란을 낳기도 한다. 충남 공주의 김종필 박찬호 박세리, 충북 음성의 반기문, 전남 장성의 임권택, 경기도 군포의 김연아, 강원도 영월의 유오성 등 산 자의 동상이 80여기다. 그 저변에 우리의 허영이 깔려 있다. 그 허영의 근본은 경박한 권력욕과 물욕이다. 고은 이윤택 등의 ‘참사’가 우리 안에 도사리고 있는 셈이다.

고흥 출신 전 국가인권위원장 조영황 변호사. 고향 동문들이 공덕비를 세우려 하자 강하게 말했다. “비를 세우는 순간 부셔버릴 것이며 고향과 인연을 끊겠다.” 인생 길다.

전정희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그래픽=이영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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