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김태용] 말과 인형



작년 겨울 알게 된 뒤 자주 보는 친구가 있다. 친구는 평상시에는 거의 말을 하지 않고, 대화할 일이 있으면 약간 더듬거리고 천천히 단어를 고르며 말을 이어가곤 한다. 천천히 말하는 사람을 마주하고 있으면 단순히 발화되는 말이 아닌 종이 위에 썼다 지웠다 하는 문장의 언어처럼 읽히곤 한다. 가끔은 답답함이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 되겠지만, 어릴 적부터 나 역시 ‘답답해, 어서 말을 해, 남자가 왜 그래’라는 공격을 많이 받아왔기에 천천히 말하는 사람들에 대한 호기심이 자연스럽게 생기면서 비슷한 생물종처럼 느끼기도 한다. 눌변의 말들이 문학의 언어라는 생각에 그 말들과 그 말의 주인에게 귀를 더 기울이게 된다. 적극적으로 말의 독자가 되는 것이다.

친구는 말뿐만 아니라 여러모로 계속 흥미를 유발한다. 책과 음악에 대한 조예는 물론 요즘 말로 힙해 보이는 패션감각을 갖고 있다. 가끔 취미로 옷과 가방 그리고 인형들을 만든다고 한다. 대화를 나누다가 초등학교 5학년인 아들 이야기가 나왔다. 아이는 의료용 살색 테이프로 작은 인형을 만들어 그것을 자주 만지고, 잠들기 전에는 꼭 그 인형을 손에 쥐고 입술에 부비는 습관이 있다. 아이에게 인형은 ‘피너츠’에 나오는 라이너스의 담요처럼 절대적인 대상물처럼 보이지만 제법 외형적으로 남자사람이 되어가는 아이가 어느 날 그 인형을 놓아주고 기억마저 잃어버리면 내가 더 슬플 것만 같다.

이야기 끝에 반농담으로 인형 하나 만들어 달라고 한 뒤 다시 만난 자리에서 친구는 헝겊인형을 보여주면서 아이의 이름을 물어보았다. 그리곤 가방에서 반짇고리를 꺼내 인형 뒤에다 바느질로 이름을 새겼다. 인형을 건네받은 아이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고, 그날 밤부터 두 개의 인형을 손에 쥐고 잠들게 되었다. 며칠 전 우연히 만난 친구에게 아이가 너무 좋아한다고 말하자, 친구는 ‘저, 정말, 정말요?’ 하며 숨길 수 없는 기쁨을 보여줬다. 왠지 그 표정이 아이가 인형을 받았을 때 표정과 비슷해 보여 둘이 만나 말을 더듬으며 어색하게 인사하는 장면을 상상하게 만들었다.

김태용(소설가·서울예대 교수)

그래픽=이은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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