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래 칼럼] 평화, 새로운 시작 預言의 성취



4·27 남북 정상회담에 이어 북·미 정상회담이
순조롭게 진행되면 한반도에 새 지평 열릴 것
정부는 신중하되 강한 의지로 추진하고 시민사회는
낙관도 비관도 말고 담담하게 바라며 지켜봐야


한반도에 새 기운이 감돈다. 오는 27일 열리는 남북 정상회담이 변화의 시작이다. 이어 북·미 정상회담까지 순조롭게 진행되면 한반도는 그야말로 새로운 지평이 열릴 것이다. 불과 반년 전까지만 해도 한반도 전쟁설이 파다했었는데 참으로 기묘한 반전이다.

변화의 주인공은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미국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다. 여섯 번의 핵실험과 거듭된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발사로 한국과 주변국들을 위협했던 북한의 변화가 놀랍고, 고집불통의 괴짜 트럼프 대통령의 적극적인 대응이 어리둥절하다.

구약성서에 나오는 바사왕 고레스(BC 600∼529, 페르시아 제국의 키루스 2세) 얘기의 현대판을 보는 듯하다. 고대 이스라엘은 남북으로 분단된 채 각각 멸망의 길을 걸었는데 특히 남왕국 백성들은 정복자 바빌로니아의 포로로 끌려갔다(BC 598, 586). 이후 키루스 2세는 바빌로니아를 무너뜨리고 BC 538년 포로들의 귀환을 허락하는 칙령을 내린다.

구약성서 예레미야서에는 바빌로니아로 끌려간 이들은 반드시 돌아올 것이라는 예언(預言)이 곳곳에서 나온다. 문제는 그 예언의 성취가 정복자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키루스 2세는 고대 중동지역을 평정해 통일제국을 만든 정복왕이다. 어떻든 예언은 성취됐고 포로들은 고향으로 돌아왔다.

사실 김정은과 트럼프가 키루스 2세의 역할을 맡는다고 해도 폄하할 이유는 없다. 예언의 성취는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 포로들의 귀환을 예언의 성취로 본 예언자 이사야는 아예 키루스 2세를 ‘내 주가 기름 부어 세운 자(이사야 45:1)’, 즉 메시아라고 고백한다. 키루스 2세를 세운 이가 따로 있다는 얘기다. 한반도에 평화가 온다면 우리도 같은 심정일 터다.

한편으론 이스라엘 포로들의 태도도 간과할 수 없다. 언젠가는 돌아갈 것이라는 강한 믿음으로 고유의 문화와 풍습을 지켜왔기에 결국 예언이 성취될 수 있었다. 분단과 그로 인한 전쟁공포 속에서도 우리가 평화를 향한 희망을 간직해야만 하는 까닭이 바로 그것이다.

이번 남북 정상회담의 표어가 ‘평화, 새로운 시작’인 것처럼 아직은 시작에 불과하다. 더구나 낙관만 하기에는 넘어야 할 장애물이 너무나도 많다. 식언을 거듭해온 북한의 과거 행태를 생각하면 불안하기 짝이 없다. 비핵화에 대해서도 ‘단계적 조치’를 주장하는 북한과 ‘일괄적 타결’을 외치는 미국의 입장이 매우 달라 보인다.

따지고 보면 ‘일괄 타결’과 ‘단계적 조치’는 전혀 다른 얘기가 아니다. 핵과 미사일 폐기와 북한 체제 보장 및 평화체제 구축 같은 큰 주제는 일괄적인 합의와 타결이 마땅하다. 하지만 핵과 핵시설 등의 폐기는 꼼꼼하게 검증이 이뤄져야 하기에 단계적으로 전개될 수밖에 없다. 그 과정에서 예상치 못한 애로가 불거질 수도 있다.

시작이 없는 완성은 있을 수 없다. 남북, 북·미 정상회담 이후에도 평화체제로의 전환은 주변국들의 협력이 필요한 만큼 그에 대한 대응도 중요하다. 꽉 막혔던 담을 헐고 가보지 않은 길을 갈 수밖에 없는 지금, 큰 그림도 중요하고 세밀한 대응도 그에 못지않게 절실하다. 평화는 이미 민족의 명령이다. 우리에겐 그 길밖에 없다.

우리가 바라는 평화는 한 세기 전 식민치하의 고난 가운데서도 미래를 내다보며 외쳤던 선현들의 예언과도 같다. 1919년 3·1 운동 당시 선현들은, 조선의 독립이 동양평화는 물론이고 세계평화와 인류 행복에 필요한 과정이라고 주장했다. 독립을 민족의 사소한 감정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세계평화의 시작이라고 자리 매김한 것이다.

하지만 해방과 더불어 갈라진 한반도, 그리고 전쟁과 대립이 이어지면서 예언의 성취는 자꾸만 뒤로 밀려났다. 이제 그 평화 예언이 다시 새 기운을 맞이하고 있다. 역사학자 강만길은 평론집 ‘분단시대의 역사인식’(1978)에서 진정한 해방은 분단의 종식에 있다고 봤다. 분단 극복이라는 참 해방을 맞는 그날 비로소 평화의 예언은 성취될 것이다.

변화를 꿈꾸는 만큼 정부와 시민사회의 역할분담이 더 절실해졌다. 정부는 차분하고 신중하게 임하되 강한 믿음과 의지로 추구해야 한다. 시민사회는 섣부른 낙관론도, 어이없는 비관론도 물리치고 불필요한 논란도 피하면서 담담하게 바라며 지켜보자. 3·1 독립선언서는 끝 부분에서 예언의 성취 가능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선포한다.

“조상님들의 혼령이 보이지 않는 가운데 우리를 돕고 온 세계의 새로운 형세가 우리를 밖에서 호위하고 있으니, 시작이 곧 성공입니다. 다만 앞길의 광명을 향하여 힘차게 곧장 나아갈 뿐입니다.”

때가 열린다. 예언 성취의 때가.

조용래 대기자 jubile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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