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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돋을새김-권혜숙] 슬기로운 팬질 생활



한국계측기기연구센터 오광석 대표는 ‘가왕’ 조용필의 열성팬이다. “10대 소녀처럼 조용필을 좇았다”는 그는 2000년부터 외국 공연까지 조용필의 모든 공연을 한 번도 빼놓지 않고 봤다고 한다. 존경하는 인물로도 조용필을 꼽는다. 공학자이자 경영인의 선택으론 다소 의외인데, 리허설에서도 사소한 것까지 최선을 다하는 그를 보며 자기 분야의 1인자가 되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그 꿈대로 공고 졸업 후 직장을 다니며 주경야독, 박사 학위를 받고 창업해 베트남에도 지사를 둔 강소기업을 일궜다.

극진한 ‘팬심’ 덕분인지 조용필과 개인적인 인연으로까지 발전했다. 지금은 조용필 장학재단의 이사를 맡아 해외 공연 가는 비행기에서 그의 옆에 앉는 사이가 됐다. 요즘 말로 완벽한 ‘성덕’인 셈이다(성덕은 ‘성공한 덕후’의 줄임말로, 동경하는 대상을 만나게 된 팬을 가리킨다. ‘덕후’는 한 분야에 푹 빠진 사람을 말하는 일본어 ‘오타쿠’를 한국식으로 바꿔 부른 ‘오덕후’의 줄임말이다).

조용필이 올해 데뷔 50주년을 맞았으니, 그와 세월을 함께한 팬 중에는 오 대표처럼 ‘덕력(덕후의 공력)’이 만만찮은 성덕들이 한두 명이 아닐 것이다. 조용필의 50주년 관련 이벤트를 계획하고 총괄하는 곳이 바로 그런 이들이 자발적으로 모인 ‘조용필 50주년 추진위원회’다.

“우리가 무슨 엄청난 실체가 있는 건 아니에요. 조용필 선생님이 ‘폴 매카트니가 50주년 행사를 했느냐, 그런 거 하면 안 된다, 새 음반 만드는 데 매달려야 하니 나는 안 하겠다’ 하시는 거예요. 주인공이 안 나서니 우리가 나섰지요.”

국립극장장을 지낸 안호상 홍익대 공연예술대학원장의 설명에 따르면 50주년인 만큼 방송 PD 출신인 이남기 전 청와대 홍보수석을 비롯해 작가, 공연 기획자 등 조용필의 오랜 지인들이자 ‘기본적 팬심’을 장착한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 15명이 여러 각도에서 조용필을 조명하자고 뜻을 모았다고 한다.

조용필과 중학교 동창인 배우 안성기가 “용필아∼”라고 부르는 모습이 화제가 됐던 50인 릴레이 축하 인터뷰 ‘50&50인’도 이들의 아이디어였다. 50주년 프로젝트의 공식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 유튜브 채널도 오픈했다. 7년 동안 TV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조용필이 21일 방송된 ‘불후의 명곡’(KBS2)에 출연하도록 설득한 것도 이들이었다.

조용필의 3대 팬클럽 ‘이터널리’ ‘미지의 세계’ ‘위대한 탄생’도 여느 아이돌 팬덤 못지않게 팬심을 폭발시키고 있다. 이터널리 회장 문성환씨는 “팬클럽 연합으로 서울 강남역 인근에 50주년 축하 대형 광고를 내걸었고, 다음 달에는 뉴욕 타임스스퀘어에도 축하 광고를 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팬클럽별로는 위대한 탄생이 서울과 대구 지하철, 광주 시내버스에 축하 광고를 했고, 미지의 세계는 600쪽짜리 ‘조용필 백과사전’ 출간을 준비 중이다. 이터널리는 조용필의 전국 투어 공연장마다 그의 앨범 재킷과 사진 전시회를 개최하기로 했다.

미지의 세계 회장 이정순씨는 “40여년 팬 생활의 하루하루, 매 공연이 특별했다”며 “거의 매년 오빠의 공연을 보며 같이 나이들 수 있는 우리는 행복한 팬”이라고 말했다. 위대한 탄생의 회장인 안동대 윤석수 교수는 “팬클럽 활동을 좋지 않게 보는 시선도 있었지만 이젠 동료들도 ‘인생에 그런 열정을 쏟을 대상이 있다는 게 좋아 보인다’고 한다”고 했다.

‘친구여’ 가사처럼 ‘슬픔도 기쁨도 함께했던’ 조용필에게도, 그의 팬들에게도 서로가 서로에게 감사한 존재일 것이다. 하지만 ‘내 가수’가 ‘가왕’이 아니면 어떻고, 내가 성덕이 아닌 한낱 덕후이면 어떠랴. 문화인류학자 이응철 덕성여대 교수는 ‘우리는 항상 무엇인가의 팬이다’라고 했고, ‘적당한 덕질은 삶의 활력소’라는 게 뭇 덕후들의 증언이다. “조용필에게서 즐거움과 안식, 좋은 에너지를 얻었고, 삶을 대하는 자세를 배웠다”는 그의 팬들처럼 모든 덕후들의 ‘슬기로운 팬질 생활’을 응원한다.

권혜숙 문화부장 hskwo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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