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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호 칼럼] 그래서 장막 뒤가 더 중요하다



남북 정상회담 결과에 따라 역사적 전환기에 접어들 수 있지만,
우리 내부에는 불편해 할 사람들도 있어
뜨거운 가슴과 신념보다는 차가운 머리와 책임으로
회담의 구체적 성과물을 내놓아야 역사가 평가할 것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작심하고 손님을 끌어 모을 모양이다. 오는 27일 판문점 남북 정상회담이 열릴 때 남쪽 기자들에게 군사분계선을 넘어 북쪽 지역에서의 취재를 허용했다. TV 생중계다. 국제무대에 동북아 평화·안정을 위한 게임 체인저로서, 통큰 젊은 지도자로서 화려하게 데뷔하겠다는 의미로 읽힌다. 잘 골랐다. 지구상 마지막 남은 분단 국가, 냉전의 잔재가 남아 있는 지역, 미국과 맞짱 뜨는 지도자…. 이 장면을 연출하기 위해 집권 후 피의 숙청을 벌이고, 전쟁 위기 직전까지 핵과 미사일로 도발했다면 그는 범상치 않은 기획력을 가졌다고 볼 수 있다. 몇몇 파격적인 조치, 미국과의 직접 대화에서도 그런 흐름은 보인다. 여기서 그치는 것도 아니다. 북·미 정상회담이 기다리고 있다. 남북 정상회담이 시즌1이라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의 만남은 내용이 더 흥미진진한 시즌2다. 이런저런 분위기로 봐 아마도 시즌 3, 4나 그 이상까지 이미 기획을 끝내고 시기와 출연진을 조절해 가며 흥행 대박을 노리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남북 및 북·미 정상회담에서 의미 있는 결과물이 나오면 그야말로 역사적 전환기에 접어든다고 볼 수 있다. 조심스러운 예측이지만 분위기 상 그럴 가능성도 적지 않다. 항구적인 한반도 평화와 비핵화 기틀을 완벽하게 다질 수 있는 성과만 나온다면야 김정은이 좀 으쓱 대면서 등장하는 장면을 굳이 폄훼하거나 불편하게 바라볼 필요는 없다. 그 정도쯤이야 더 큰 목표를 위해 포용할 수 있다. 오히려 문제가 불거지자면 우리 내부에서 불거질 가능성이 있을 게다. 정상회담 결과가 상당히 평가받을 만해도 우리 내부에는 불편하게 여길 사람들이 꽤 있다. 보수라고 다 같은 보수가 아니다. 책임 있고 합리적인 보수가 있는가 하면 막무가내 보수도 상당히 많다. 물론 진보 진영도 마찬가지다. 회담 결과가 어떻든 불편해 할 사람들에게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서, 그보다는 드러내놓고 말하지는 않지만 내심 꺼림칙하게 생각하는 이들을 잘 설득하기 위해서라도 정부의 세심한 관리가 필요하다. 향후 두 정상회담 이후 상황관리는 여론의 향방이 결정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려면 정부가 나서 남북 정상회담 결과에 너무 환상을 갖게끔 하는 걸 경계해야 한다. 결과물을 놓고 분석할 향후 전망도 장밋빛으로만 해석해서도 곤란하다. 1, 2차 정상회담 내용은 결과적으로 보면 감성과 민족이 이성과 합리성을 우선했다. 가슴만 벅찼다. 그 시대의 한계이기도 했다. 이번에는 그 한계를 넘어서 현실적이고 지속가능한 구체성을 확보해야 한다. 단지 민족의 염원인 통일이 아니라 동북아 안정과 평화, 공동 경제이익 추구의 시각도 보태져야 한다. 그래야 이 나라 대다수의 합리적 여론이 강력히 지지할 수 있다. 그런 합리적인 이들에게 전달될 메시지가 중요하다. 문재인 대통령의 절제 있는 표정과 언동은 그래서 중요하다.

386세대를 중심으로 한 이 정권 핵심들이 북한을 보는 시각은 좀 감성적이고 낭만적이었다. 그들이 젊었을 때는 선과 악이 똑 부러지게 구별됐을 때이니 그것이 통했다. 지금은 아니다. 그 시절의 신념이 지금의 책임으로까지 연결된다면 대책이 없다. 남북관계는 신념이 아니라 마래 세대를 위한 책임의 문제다. 굳이 막스 베버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정치 특히 남북문제에서는 신념윤리보다 책임윤리가 훨씬 더 커야 한다는 점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하여 선언적 의미도 중요하지만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회담 결과가 더 중요하다. 이번 회담은 탑다운 방식으로 진행된다. 1, 2차 정상회담 사례나 남북의 특수성, 역사성으로 볼 때 두 정상이 현장에서 결정하는 내용과 표현이 적지 않을 것이다. 합의 내용에 감성적 표현보다는 현실적이고 지속가능한 내용이 들어가길 바란다. 환호 뒤의 공허함보다는 또박또박 현실화될 것이라는 구체성을 느낄 수 있게끔 해야 한다.

남북보다 북·미 정상회담이 더 비중이 있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더 큰 성과물은 김정은과 트럼프가 나눠가질 게다. 한반도를 둘러싼 어쩔 수 없는 지정학적 현실이다. 하지만 문·김의 대화 내용을 토대로 시즌2의 더 큰 그림이 그려질 수 있고, 북·미 간 창조적 빅딜이 가능하다. 그래서 합의문보다 두 사람의 장막 뒤 대화가 훨씬 더 중요하다. 장막 뒤 벌어지는 일들을 다 밝힐 필요는 없겠지만, 뜨거운 가슴이 아니라 차가운 머리의 대화여야 한다. ‘심장에 이끌려 행동하다간 두뇌가 후회한다’는 말이 있다. 뜨거운 가슴만 있는 공허한 선언보다는 차갑지만 실현 가능한 회담 결과를 간절히 원한다. 역사는 그걸 훨씬 높게 평가할 것이라고 믿는다.

김명호 수석논설위원 mh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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