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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모든 것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사무치면 꽃이 피리라”





모든 것이 국민 보시기에 좋았다.

청와대를 출발한 일행이 맨 처음 차를 멈춘 곳, 인근에서 환영 나온 시민들은 일일이 손을 잡아주는 대통령의 눈이 다소 충혈된 것을 보았으리라. 어찌 지난밤에 편히 잠들 수 있었겠는가. 판문점으로 가는 자유로의 한강변 습지와 풀숲에는 아마도 늦잠에서 깬 고라니 가족과 물새들이 놀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행렬을 지켜보았으리라.

그립고 아름다움 그 이름 ‘평화’

모습을 드러낸 북의 젊은 지도자는 우리 대통령에게 분계선을 넘어볼 것을 즉흥적으로 권유했다. 대통령은 잠시 ‘월북’했다 돌아왔다.

남북이 손을 맞잡은 그 바로 아래 분계선은 결코 ‘넘기 힘든 높이’가 아닌, 5㎝의 무심한 경계표지일 뿐이었다. 공동경비구역은 판문점이 명명된 이후 처음으로 1000명의 외신기자들이 주목하는 ‘공동취재구역’으로 변모했다.

‘새로운 역사는 이제부터. 평화의 시대, 역사의 출발점에서’라고 쓴 방명록은 미국 CNN 방송 화면으로 실시간 지구촌 방방곡곡에 ‘A New History Begins Now. An Age of Peace(새로운 역사가 지금 시작된다. 평화의 시대가)’로 방영되었다.

평화. 얼마나 그립고 아름다운 이름인가!

꽃이 진 자리에 새로운 역사 ‘쑥쑥’

이는 인종 종교 국경을 초월한 모든 인류의 보편적 소망이다. 그래서 우리 헌법도 ‘국제평화의 유지에 노력하고 침략적 전쟁을 부인한다’(제5조)고 천명하고 있다.

두 정상이 분계선을 아래로 두고 손을 포개는 순간, 그것은 ‘시프트 키(Shift key)’가 되었다. 이는 단지 육체로서의 손이 아니다. 한반도 모든 국민의 소망이 응축된 표상인 것이다. 북한군 수뇌부가 문 대통령께 거수경례를 하고, 그리고 분단고착이 평화지향으로 바뀌는 눈부신 변환!

회의장 1층의 북한산 그림, 2층의 금강산을 병풍처럼 두르고 이제 남과 북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새로운 역사’를 지금부터 써나갈 것을 맹세했다. ‘밀당’을 버리고 ‘좋은, 필요한 얘기’만을 해야 함을 약속했다.

오전 10시30분으로 예정됐던 회담 시각이 15분 앞당겨진 것 역시 상서로운 조짐으로 보고 싶다. 한민족은 지금 마음이 급한 것이다!

서로에게 아무런 이득이 없는, 무기장사의 배를 불릴 뿐인 그 이름도 현란한 온갖 무기를 걷어버리고, 무장을 풀고, 나무를 심고, 새로운 살림을 시작하고 싶은 마음이 자연스럽게 표출된 것이 아닐는지! 당장에 ‘칼을 벼리어 보습을’ 만들 수는 없을지라도 그런 염원이 모여야 작은 무기 하나라도 내려놓을 수 있기에.

연록의 봄물결… 기적같은 풍경

북이 먼저 문서나 선언이 아닌, ‘이행’의 중요성을 요구한 것도 이전과는 다른 행보다. 돌아보면 분단 이후 남북이 최초로 합의한 ‘7·4 남북공동성명’ 이래 1988년 ‘7·7선언’(한민족공동체통일방안), 2000년 6·15 남북정상회담, 2007년 10·4 선언, 그리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모두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이라는 7·4 공동성명의 기치 아래 일관되게 놓여 있다. 비록 이것이 남루한 문서에 그쳐버리고 남과 북이 모두 권력기반을 공고히 하는 데 기능했다 할지라도 그 정신과 가치가 훼손된 것은 아니다.

11년 만에 다시 손 맞잡은 오늘. 하늘도 우리에게 응답했다. 호수빛 하늘 아래 연록의 봄물결이 넘실거린다. 굳은 껍질을 뚫고 꽃들이 팝콘마냥 터져 오른다. 꽃이 진 자리에 새 꽃이 솟구쳐 오르는 실로 기적 같은 풍경이다.

문 대통령이 물었다. “나는 언제 넘어갈 수 있나요?”

김 위원장이 대답했다. “지금 넘어가 볼까요?”

인민군으로 남하했다가 거제포로수용소에서 석방된 후 제주도에 정착한 아버지를 둔, 내 친한 벗은 아버지의 고향 함경도 무산까지 걸어가겠다고 한다. 제주 올레길을 개척한 그녀는 어젯밤 잠을 못 이루었다. 일제에 빼앗긴 땅에서 사무치는 소망을 정갈하게 노래한 박두진 시인이 떠오른다.

그날이여. 부디 따순 날에 오소서

“오라. 여기. 너는, 나뭇잎 푸를 때에. 오라, 다만 피는 꽃 고울 때에. 산 너머 산을 너머, 뻑국새 목이 잦듯 너도 나를 부르며, 햇볕살 따실 때에 나를 와서 안아라”

‘삼각산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물이 용솟음칠’ 그날이여. 부디 따순 날에 오소서.

소설가 유시춘

약력=△1951년 경상북도 경주 출생 △73년 고려대 국문학과 졸업 △73년 월간 ‘세대’에 중편 ‘건조시대’로 등단 △87년 민주쟁취국민운동본부 상임집행위원 △94년 민족문학작가회의 상임이사 △99년 국민정치연구회 정책연구실장 △2001∼2004년 국가인권위원회 상임위원 △2007∼2011년 한국문화정책연구소 이사장 △대표작 ‘안개 너머 청진항’ ‘우리 강물이 되어’

삽화=전진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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