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황시운] 무례한 선의



일주일에 두 번, 인근 대학병원으로 재활치료를 받으러 다닌다. 병원에 갈 때마다 나는 재활의학과의 진료대기실 대신 재활치료실 옆 카페테리아에서 치료 순서를 기다리곤 한다. 침대에 실린 채 치료를 받으러 내려오는 초기 환자들이 많은 대학병원의 특성상 진료실과 치료실 주변은 늘 혼잡하기 때문이다. 그날도 접수를 마치고 카페테리아로 갔다. 한쪽에 자리를 잡고 휠체어의 브레이크를 잠그는데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아이고, 젊은 사람이 어쩌다 그랬대” 질문인지 탄식인지 모를 말을 건넨 이는 고운 인상의 노부인이었다. 한껏 찌푸린 그의 미간에서 안타까움이 뚝뚝 묻어났다. ‘또 시작됐구나.’ 나도 모르게 생각했다. 내가 머뭇거리는 기색을 보이자 노부인이 다시 말했다. “장애인이 화장을 참 곱게도 했네. 기특하기도 하지.” 모욕감이 느껴졌다.

나는 대답할 마음을 거두고 가방에서 헤드폰을 꺼내 쓴 뒤 책을 펼쳐 들었다. 대화하고 싶지 않다는 내 나름의 표현이었다. 마음 같아선 그곳에서 나가고 싶었지만 치료 순서가 가까워 와서 그럴 수는 없었다. 사고를 당해 하반신 마비 지체장애인이 된 지 이달로 꼭 7년이 된다. 그동안 나는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장애에 대한 질문과 위로를 받아왔다. 낯선 이들의 관심이 그다지 반가웠던 것도 아니고, 사고의 순간을 복기하는 것이 고통스럽기도 했지만, 매번 최선을 다해 대답하려 애썼다. 상대방이 선의를 보이면 나도 선의로 보답해야 한다고 믿었다. 외출을 앞두면 지레 가슴이 뛰고 속이 울렁거리는 것은 전적으로 내 문제인 줄로만 알았다. 선의는 베푸는 쪽이 아니라 받아들이는 쪽에서 기꺼워야 진짜 선의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 것은 최근의 일이다. 내 마음에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선의가 아니라 무례라고 단정하고 나자 비로소 마음이 편해졌다. 선의에는 섬세한 배려가 필요하다. 혹시 상대에게 곤란한 대답을 강요하거나 불필요한 참견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내 선의의 기저에 우월감이 자리하고 있진 않은지 세심하게 돌아봐야 할 일이다.

황시운(소설가)

삽화=공희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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