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하주원] ‘End Game’



남북 정상회담이 있던 날 실시간 뉴스는 놓치고 지하철에 앉아 뒤늦게 동영상으로 봤다. 영화 같은 장면에 그만 눈물이 났는데, 내 스마트폰을 위에서 같이 보셨는지 아직도 정치쇼에 속고 있느냐며 핀잔을 들었다. 그런 말을 들으니 괜히 희망을 가지나 싶었다. 지금보다 남북관계가 소원했던 1980년대에도 통일 또는 교류에 대한 기대는 계속 있었다. 금세 통일이 이루어질 것 같은 희망을 갖다가 기대 접기를 반복했다. 물론 통일은 ‘어벤저스3’에서 닥터 스트레인지가 말한 1400만605분의 1처럼 희박한 미래일 수 있다. 그 장면의 “We’re in the end game now”에 대한 번역에 논란이 있는 것은 단순한 문장도 아니고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결정적 대사가 절망적인 어조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남북의 화해도 정상회담 이후 기대만큼 빨리 진행되기도 어렵고 난관이 당연히 있을 텐데, 그 현상에 대한 해석은 각자 다르다. “우리는 지금 마지막 결정적인 단계에 있다”고 받아들이기도 하지만, 자막대로 “이제 가망이 없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해석에 따라 미래를 위한 기다림 또는 주권의 포기, 정반대의 의미이다. 영화의 자막 번역이야 실수지만 같은 현상을 각기 다르게 받아들이는 것은 삶에서 경험하고 역사에서 배운 감정 탓일까.

작은 쥐에게도 희망을 줬다 전기 충격을 반복하면 절망을 배우고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는데 이를 ‘학습된 무기력’이라고 한다. 세상은 10보 전진하고 5보 후퇴하는 과정 속에서 발전하며, 질병의 회복도 비슷한 경과를 보인다. 우울증 치료를 시작하면 10보 전진하다 5보 후퇴하는 때가 온다. 후퇴의 순간에는 이미 전진했음을 잊고, 절망의 단서를 찾거나 치료를 포기하기 쉽다. 그런 때가 올 수 있다고 미리 말씀드린다. 역사의 도약도 마찬가지로 정상회담의 감동에 겨워 기대했던 바처럼 다음 단계가 미끄러지듯 순조롭지 않을 수도 있다. ‘end game’은 과연 무엇인가. 가망이 없으니 학습된 무기력이 커질까, 아니면 결정적인 단계에 온 것일까.

하주원(의사·작가)

삽화=공희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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