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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사초롱-김다은] 우리 안의 확성기를 철거할 때



미워하는 감정이 있을 때, 그 감정이 입에 나타나기 마련이다. 상대방의 결점을 부각하기 위해 부풀리고, 거짓말까지 부지불식간 내뱉게 된다. 적대감이 ‘확성(擴聲)’되는 것이다. 그동안 대북·대남 확성기도 정말이지 긴 세월 동안 서로 비난하면서 상대의 결점을 부각해 왔다. 판문점 선언 이후 양측 모두 확성기를 완전히 철거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군사분계선 일대의 확성기 방송시설이 철거되고 난 이후, 고요해진 주변의 풍경을 상상해본다. 적대적인 인간들이 만들어낸 비난의 소음이 무성했던 그곳은, 오월의 투명한 공기가 만지고 지나가며 만들어내는 나뭇잎들의 사각거림으로 가득 차 있을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단독 회담을 하던 도보다리 위에서 청명하게 울던 되지빠귀는 다른 새들을 불러 모아 확성기가 사라진 빈자리 근처에서 합창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정치적인 의미는 말할 것도 없고, 철거된 확성기의 문화적인 의미는 무엇일까. 인류 역사를 살펴보면 수렵과 채취 시절에는 먹이를 찾아 끊임없이 움직였고, 이동 과정 중에 강한 자가 약한 자의 고기나 식량을 서슴없이 빼앗았다. 한 번 지나치면 다시는 보지 않을 익명이었기에 공공연한 적대 행위로 원하는 것을 쟁취하는 것이 불편하지 않았다. 그런데 한곳에 정착하게 된 농경시대에는 계속 대면하고 서로 도와야 했기에 적대감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 더 유익할 수밖에 없었다. agriculture(농업)가 culture(문화)에서 파생되었듯이, 문화라는 개념이 농경시대에 처음 형성되었다고 보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무력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것이 아니라 지혜로 상대방을 설득하는 것이 문화라는 개념이었다. 그러므로 핵무기를 앞세웠던 북한은 말할 나위도 없고, 남한이 확성기로 공공연하게 적대감을 표출해 온 것은 21세기 문화 강국을 자부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상대방과 원시시대의 관계를 은연중에 이어왔음을 확인시켜 준다.

이런 독특한 관계가 판문점 부근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매일 지하철 안에서, 엘리베이터 안에서, 화장실에서, 얼굴을 보면서도 스쳐 지나가는 익명으로 남는다. 그뿐만 아니라 백화점 점원들과 대면하고 상품을 사고파는 관계나 전화 서비스업 종사자들과 신분을 밝히고 길게 통화하는 관계도 피상적인 익명으로 남는다. 심지어 공공기관, 도서관, 119구조대 등으로부터 적절한 도움을 받으면서도 제한적인 접촉을 할 뿐이다. 과거에는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 것을 익명성으로 여겼다면, 현대사회에서는 확연한 신분 노출 상태에서도 깊이 없는 상호작용 탓에 익명 관계로 남는 경우가 많다.

익명 관계일 때의 언행을 새로운 문화 척도로 보게 된 것은 이미 오래전부터이다. 미국의 사회학자 어빙 고프만이 제안한 ‘시민적 무관심(civil inattention)’이 대표적인데, 가령 엘리베이터를 타면 주변 사람들을 확인한 후 더 쳐다보지 않는 행위이다. 타인을 불편하게 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편안함을 지키기 위한 것으로 ‘예의 바른 무관심’이라고도 한다. 이는 정체를 모르는 익명일 때 문화인이 가져야 하는 눈길이나 태도를 알려준다는 점에서 매우 유용한 기준이었다.

하지만 판문점 선언 이전의 남북한 관계처럼 서로의 정체를 뻔히 알면서도 익명처럼 행동하는 것이 요즘은 더 고통이 되고 있다. 고프만과 유사하게 표현해보면 시민적 익명성이라고나 할까. 지혜와 상호 협조를 미덕으로 여겨야 하는 문화집단이 ‘시민’인 데 반해, 시민의 이름으로 권리를 주장하면서 폭언이나 횡포를 일삼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말인데 남북의 확성기를 철거한 이 시점에서, 우리도 사회 곳곳에 그리고 각자 내면에 높이 매달아 놓은 시끄러운 확성기를 내려놓을 용기가 필요하다. ‘제발 조용히 좀 해요’. 미국의 소설가 레이먼드 커버의 유명한 소설집 제목이 자꾸 생각나는 것도, 권리 이전에 시민이 갖춰야 할 의무이자 교양이 필요하다고 느껴서 일 것이다.

김다은 소설가 (추계예술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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