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수하고 끝난 비핵화 외교전’ 북·미 간극 드러낸 ARF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왼쪽)과 이용호 북한 외무상이 4일 싱가포르 엑스포 컨벤션센터에서 열린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 기념촬영 행사에서 만나 밝은 표정으로 악수하고 있다. 오른쪽 위는 강경화 외교부 장관. 웃고 있는 모습과는 달리 비핵화 이행 및 대북 제재 해제를 둘러싼 이견으로 북·미 및 남북 외교장관 회담은 불발됐다. 뉴시스


폼페이오 “대북제재 엄격히” 이용호“우리만 안 움직일 것” 결국 할 말만 하고 헤어져
남북, 북·미회담 모두 불발… 대화의 끈이 유일한 위안


미국과 북한은 북핵 외교전이 펼쳐진 아세안(ASEAN·동남아국가연합) 관련 외교장관회의에서 각자 할 말만 하고 헤어졌다. 미국은 대북 제재의 엄격한 이행을, 북한은 종전선언을 요구하며 맞서 교착상태에 빠진 비핵화 협상의 물꼬를 트지 못했다. 기대를 모았던 남북, 북·미, 남·북·미 외교장관 회담은 어느 하나도 열리지 않았다. 북·미 모두 서신 등으로 대화의 끈을 놓지 않고 있는 것이 현재로선 유일한 성과다.

이용호 북한 외무상은 4일 싱가포르 엑스포 컨벤션센터에서 열린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 연설에서 “미국이 우리의 우려를 가셔줄 확고한 용의를 행동으로 보여주지 않는 한 우리만 일방적으로 움직이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종전선언을 평화보장을 위한 ‘초보의 초보적 조치’라고 표현하면서 6·12 북·미 정상회담 공동성명의 동시적·단계적·균형적 이행을 강조했다. 북·미 관계 개선,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 완전한 비핵화가 동시에 진행돼야 한다는 입장을 재확인한 것이다.

이 외무상이 원고지 20장 분량의 연설문을 발표할 때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은 회의장에 없었다. 그는 레트노 마르수디 인도네시아 외교장관과의 회담 일정 때문에 27개국 중 두 번째 순서로 연설하고 자리를 떴다.

폼페이오 장관은 대신 ARF 회의 시작 전 별도 기자회견을 열어 북한을 압박했다. 그는 “나는 아세안 회원국들에 북한으로 들어가는 석유의 불법적인 선박 간 환적을 완전히 중단하는 것을 포함한 모든 제재 조치를 엄격히 시행할 것을 요구했다”고 말했다. 그가 1박2일 싱가포르에 머물면서 일관되게 내놓은 메시지는 제재 이행이다. 트럼프 행정부는 앞서 3일(현지시간) 중국과 북한의 북한 관련 유령회사 2곳 등을 제재 리스트에 추가했다. 미국은 꿈쩍도 안 하는 북한을 움직일 수 있는 지렛대가 제재밖에 없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북·미 간 입장차는 뚜렷했지만 상황 진전을 기대하게 하는 움직임이 전혀 없었던 건 아니다. 비핵화 실무협상을 맡았던 성 김 주필리핀 미국대사는 ARF 회의장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의 친서가 담긴 서류봉투를 이 외무상에게 전달했다. 이 외무상은 이 봉투를 자연스럽게 건네받았다. 북·미 간 사전 조율이 있었다는 의미다. 폼페이오 장관과 이 외무상은 기념촬영 때 만나 활짝 웃는 얼굴로 악수하며 대화를 나눴다. 워싱턴포스트는 “북·미가 악수와 잽을 주고받았다”고 평가했다.

ARF의 결과물인 의장성명에는 ‘CVID’(완전하고 검증가능하며 되돌릴 수 없는 비핵화) 문구가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강경화 외교부 장관은 5일 현지 기자간담회에서 “우리는 남북, 북·미 정상회담 표현을 그대로 따서 ‘완전한 비핵화’가 우리 입장이라는 것을 설명했지만 대다수 국가들이 CVID를 언급했다”고 말했다. CVID는 북한이 강한 거부감을 보이는 용어다. ARF 의장성명 작성은 의장국의 권한인데, 최종안이 나올 때까지 각자 원하는 문구를 넣고 빼기 위한 물밑 외교전이 치열하게 벌어진다.

강 장관은 남북 외교장관 회담이 무산된 데 대해 아쉬움을 드러냈다. 강 장관은 3일 저녁 ARF 환영만찬에서 이 외무상을 만나 정식 회담을 제안했지만 이 외무상이 거절해 성사되지 않았다. 강 장관은 “북한은 기본적으로 (아직) 외교당국이 나설 때가 아니라는 입장”이라고 말했다.

싱가포르=권지혜 기자 jhk@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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