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오피니언  >  칼럼  >  기타

[돋을새김-권혜숙] ‘나 혼자 산다’보다 ‘같이 삽시다’



끝났는데 끝이 아니다. KBS1에서 방송되는 ‘박원숙의 같이 삽시다’는 지난달 종방했지만 스페셜 방송이라는 타이틀로 그동안의 하이라이트를 모아 방송을 이어가고 있다. 소리 소문 없이 최고 10%의 시청률 효자 노릇을 한 덕분이다.

이 프로그램은 박원숙 김영란 박준금 등 혼자 사는 황혼의 여배우들이 경남 남해 박원숙의 집에서 함께 생활하며 벌어지는 일들을 보여주는 관찰 예능이다. 함께 살면서 가족 같은 신뢰가 생겨서인지 출연자들은 웬만해선 꺼내기 어려운 상처를 툭툭 털어놓는다. 박원숙은 외아들을 잃은 뒤 매일 유서를 쓴다고 했고, 이들을 찾아온 가수 혜은이는 이혼하며 헤어졌던 딸과 30년 만에 다시 만났다며 눈물을 쏟고, 배우 홍여진은 유방암에 걸렸을 때 남자친구는 떠났지만 박준금이 도와줬다며 끈끈한 자매애를 과시했다. 이런 고백 뒤엔 “세상에, 그런 일이 있었구나” “그래, 잘 버텨냈네” “사랑해”라며 같이 울고 위로하며 서로를 안아준다.

이들의 공동생활을 보며 배우 이상아는 “마음 맞는 사람끼리 이렇게 같이 살아도 좋겠다”고 했다. 실제로 박원숙은 ‘해바라기집’이라는 이름의 셰어하우스를 지어 함께 살자는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1인 실버가구가 ‘예비 독거노인’이 아니라 친구 공동체라는 ‘새로운 가족’을 이룰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한 것이다.

‘같이 삽시다’의 김동윤 PD는 경쟁작으로 ‘나 혼자 산다’(MBC)를 삼았다고 했다. 이 프로그램 역시 1인 가구인 20, 30대 스타들의 일상을 비추는데, 인기 비결에 ‘가족’이라는 키워드를 빼놓을 수 없다. 방송이 아니어도 따로 만날 만큼 가까워졌다는 고정 출연진은 서로를 가족으로 설정하고 역할놀이를 하거나 가족 같다는 표현을 자주 쓴다. 배우 이시언, 웹툰작가 기안84, 가수 헨리는 ‘세 얼간이’라는 별명으로 형제 이미지를 만들었고, 알고 보면 네 살 차이인 개그우먼 박나래와 헨리는 서로를 ‘아들’ ‘엄마’라 부른다. 혼자 중국에 머무는 헨리를 위해 박나래는 묵은지를 보내고, 헨리는 답례로 ‘엄마’를 위한 선물을 사온다. 방송인 전현무는 박나래를 여동생이라고, 박나래는 모델 한혜진을 친언니 같다고 한다.

‘나 혼자 살지만, 가족처럼 뭉쳐서 사랑받는다’는 촌평이 붙는 것도 그 때문이다. 레전드편으로 불리며 폭발적인 반응을 이끌어낸 방송분도 ‘제주도 여행’ ‘여름 나래 학교’ ‘미국 LA 여행’ 등 출연진이 공동생활을 하는 것들이었다. 혼자 지내는 삶의 애환과 재미를 보여주는 프로그램에서 출연자도 시청자도 역설적으로, 어쩌면 본능적으로, 혼자만으로는 채워질 수 없는 가족 같은 정서적 교감을 발견한 것이 주효한 셈이다.

일본의 마케팅 전문가 아라카와 가즈히사는 책 ‘초(超)솔로사회’에서 일본은 2035년이면 비혼, 이혼, 사별 등으로 인구의 절반이 1인 가구가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러면서 미래의 공동체는 사고방식이나 가치관으로 연결된 ‘확장 가족’이 될 것이라고 썼다. 우리나라도 사정이 다르지 않다. 당장 내년부터 1인 가구가 ‘부부+자녀 가구’보다 많아질 것이라는 전망이다. 전통적인 가족의 울타리가 약해지는 것이 거스르기 힘든 추세라면 꼭 거창하게 ‘대안 가족’ ‘유사 가족’ 같은 용어를 동원하지 않더라도, 다른 방식의 연대가 필요하지 않을까.

상영 중인 올해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 ‘어느 가족’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지만 진짜 가족처럼 도타운 가짜 가족의 이야기다. 영화에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가족을) 선택하면 더 강해지는 거 아닌가?” “뭐가?” “유대, 정 같은 거.”

입추를 지나도 여전한 폭염에 문득 홀로 산속에 있을 자연인들이 생각났다. 장수 프로그램 ‘나는 자연인이다’(MBN)의 주인공들 말이다. 산속 생활이 오히려 더 시원할까, 그래도 그들의 안부를 들여다볼 사람은 있을까 오지랖 넓은 걱정이 들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나 혼자 산다’보다 ‘같이 삽시다’.

권혜숙 문화부장 hskwon@kmib.co.kr


 
트위터 페이스북 구글플러스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