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로 내리는 커피] 커피 독살 기도사건이 전하는 어명



1898년 9월 12일 밤, 고종황제와 황태자가 저녁 식사를 마쳤다. 러시아공사관에서의 1년 피신 생활을 끝내고 덕수궁으로 환궁해 대한제국을 선포한 지 1년도 지나지 않은 때였다. 여기저기 전각을 세우는 공사로 인해 궁궐조차 어수선한 시절이었다. 저녁 식사 후 후식으로 커피가 올려졌다. 커피를 즐겨왔던 고종은 그 맛이 이상하다는 생각에 한 모금 입에 대고는 내려놓았지만 커피를 잘 알지 못하던 황태자는 몇 모금을 마시고는 쓰러졌다. 황제를 모시던 사람들이 급히 남은 커피를 마셨고, 모두 인사불성으로 쓰러졌다. 고종황제 커피 독살 기도사건이었다.

러시아공사관 통역관이었던 김홍륙이 친러파의 몰락으로 자리를 잃은 데 이어 공금횡령 혐의로 유배형을 받자 불만을 품고 일으킨 사건이었다. 궁중 요리사 김종화를 시켜 커피에 아편을 넣었다. 독립신문이 이 사건을 보도하면서 ‘커피차’라는 낯선 음료를 반복적으로 언급했고, 일반 백성까지 이 낯선 서양 음료를 알게 만들었다. 김홍륙에게 사형이 선고됐고, 서양 음식에 대한 경계를 요구하는 상소문이 이어졌다. 한물간 적폐세력으로 여겨졌던 수구파들은 신진 개화세력을 몰아낼 절호의 기회로 여겼던 것이다. “서양 요리로 말하면 서양 사람들만 먹는 것입니다. 대체로 우리나라 사람들의 장과 위는 서양 사람들과 달라서 보통 사람들도 먹을 수 없는데 더구나 더없이 귀한 전하에게 올리는 것이겠습니까”라는 상소문이었다.

커피 독살 기도사건을 지켜보던 최익현은 시무책 12조를 올렸다. 그중 한 조항에서 커피를 언급하며 “외국에서 오는 음식은 비록 산해진미라 하더라도 일절 먹지 말 것”을 청했다. 수구세력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중죄인의 처와 가족, 스승과 친척까지 처벌하는 연좌제, 죄인의 가족에게 참형을 적용하는 노륙법, 심지어는 공개처형 제도까지 부활시킬 것을 주장했다. 갑오개혁 때 폐지한 적폐의 상징들이었다. 고종은 역사를 되돌릴 수 없다는 소신으로 만류했지만 세상을 되돌리겠다는 수구세력 또한 굽히지 않았다. 커피가 촉발시킨 수구와 개화의 대결이었다.

고등재판소에서는 김홍륙의 처 김소사에게 무죄를 제안했지만 수구세력을 대표하던 법부대신 신기선은 곤장 100대와 징역 3년을 제의했다. 고종은 김소사에게 징역보다 가벼운 귀양을 명했다. 고종은 김홍륙의 시신을 거리로 끌고 다니는 등 공개처형을 감행한 신기선을 파면했다. 김소사에 대한 형집행이 예정된 날 신임 법부대신 서정순은 고종에게 김소사가 임신 중이라는 사실을 보고했다. 고종은 다시 곤장형을 면제시키고 바로 귀양지로 보내라고 지시했다.

지금으로부터 124년 전, 자신과 아들을 죽이려 했던 흉악범의 아내에 대한 반복적 감형을 통해 고종황제가 보여주고자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역사는 결코 되돌릴 수 없다’는 것, 그리고 나라다운 나라가 되려면 ‘최소한의 여성 인권이 보장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비운의 황제 고종이 우리 사회에 전하고자 하는 어명(御命)이다.

이길상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교육학과)
 
트위터 페이스북 구글플러스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