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 있으면 빛도 있어… 고난 속에서 연단하는 창조주를 느끼다 [우성규 기자의 걷기 묵상]

계몽을 실천한 기독교 선교사, 조선을 사랑한 독립운동가, 좌우합작의 민족 지도자인 몽양 여운형은 조선의 스포츠맨이기도 했다. 몽양기념관에 전시된 그의 상반신 노출 철봉운동 교본.






벌써 여름이다. 이번 달 걷기 묵상은 시원한 물가에서 진행한다. 수도권 전철 경의·중앙선을 타고 신원역에서 내려 몽양 여운형기념관을 찾아 올라간다. 기념관 입구에 광동학교터와 묘골애오와공원이 자리하고 있다.

광동학교는 몽양 여운형(1886~1947) 선생이 설립한 학교다. 일본이 국권을 침탈하던 1907년 몽양은 모친상과 부친상을 연달아 겪으며 고향인 신원리 묘골로 돌아와 자신의 집 사랑방에서 학교를 연다. 지리 역사 산술 등 신학문과 더불어 성경을 가르치는 기독교 자강 운동의 일환이었다. 가나안농군학교를 설립한 김용기(1909~1988) 장로가 광동학교 출신이다.

‘애오와(愛吾窩)’는 ‘나의 사랑하는 집’이란 뜻으로 몽양이 고향 집을 가리키던 말이다. 애오와공원에 해방 후 미 군정 사령관을 역임한 존 R 하지 장군의 몽양에 대한 평가가 새겨져 있다.

“여운형은 한국 정치인 중 타인이 따르지 못할 정치인으로서 세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다. 첫째로 그는 누구보다 잘 생겼다. 둘째로 뛰어난 웅변가다. 셋째로 그는 강한 감화력과 설득력을 가진 사람이다.”

하지 장군은 몽양의 외모부터 높게 평가했음에도 정작 그에게 권력을 넘기지 않았다. 미국은 해방 직후 몽양이 위원장이던 건국준비위원회(건준)를 통째로 패싱했다. 전국에 145개 지부를 결성하고 조선총독부로부터 치안권까지 넘겨받았던 자치 기구인 건준을 무시했다. 한국 현대사 비극의 출발점이다.

몽양은 이후 좌우합작 활동을 치열하게 벌이며 자택 폭탄테러를 당하는 등 신변 위협을 느끼다가 결국 서울 종로구 혜화동 로터리에서 총을 맞아 숨을 거둔다. 좌익과 우익, 모두를 섭렵했기에 통일 정부의 첫 원수가 될 만한 자격을 지녔고, 상반신을 벗은 채 체육 교본 모델로 나설 정도로 체력 단련을 강조한 조선의 스포츠맨이었지만 12번째 테러인 권총 피습은 피하지 못했다.

몽양기념관을 나와 양수리 쪽으로 남한강변 자전거길을 걷는다. 옛 기찻길을 자전거도로로 만들었기에 중간에 계속해서 터널이 나온다. 시원하다가 뜨거워지는 경험을 반복하며 어둠이 있으면 빛이 있다는 진리를 깨닫는다. 고난 속에서 연단하는 창조주의 손길과 저 멀리 눈부신 새 하늘 새 땅의 찬란한 빛을 느끼며 걷는다.

터널 대여섯 개를 통과하면 양수역 삼거리다. 세미원 쪽으로 방향을 잡고 두물머리 물래길을 걷는다. 다음 달부터는 연꽃이 피어나 더 아름다울 것이다. 이번 걷기는 종일 일정이기에 양수역 인근에서 연잎밥 등으로 점심을 해결하면 좋다.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합수 지점인 두물머리를 지나 마재마을로 향한다. 실학박물관과 더불어 조선 최고의 실학자 다산 정약용(1762~1836)의 묘소가 있는 곳이다. 드넓은 팔당호를 내려다보는 그의 묘지 안내판에 눈길이 꽂혔다.

“선생은 경세유표 목민심서 흠흠심서로 대표되는 500여권의 경집과 문집을 저술했을 뿐만 아니라 세계문화유산인 수원 화성을 설계했고 거중기 등 과학기구를 제작했으며 마과회통 등 의학서적도 남겼다. 학문적 관심은 오로지 ‘수기안인(修己安人)’ 즉 ‘어떻게 자신의 몸과 마음을 닦아 백성들의 삶을 행복하게 할 수 있는가’에 있었다.”

다산은 겉으론 배교했고 마지막까지 자기검열에 엄격했지만, 숨길 수 없는 신앙이 글에 묻어난다. 18년 귀양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와 스스로 지은 묘비 글인 ‘자찬묘지명’에는 자신의 고난을 ‘옥으로 쓰시기 위함’(天用玉汝)이라고 고백했다. 다산초당 시절 마지막 저서인 심경밀험(心經密驗)에선 신독(愼獨), 즉 절대자 앞에서의 수양을 강조한다. 수기안인을 더 줄이면 나를 닦아 남을 편안하게 한다는 뜻이다. 나는 죽고 예수님을 따라 사는 삶이 이와 다르지 않다.

양평=글·사진 우성규 기자 mainport@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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