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온의 소리] 이대남의 귀환



이대남, 문제의 시작은 역시 군대다. 어렵사리 대학에 진학했지만 입대 전 마음잡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다 군에 가서 ○고생하고, 전역하고 보니 동기 여학생보다 저만큼 뒤처져 있다. 이들은 최저 시급의 노동력을 제공하는 아르바이트 노동자요, 게임 산업과 자격증 시장의 주요 고객이다. 이번 생에는 내 집 마련이 불가능하니 주식과 코인에 몰두하는데 번번이 당하기만 한다.

이 좋은 세상 젊은 애들이 패기가 없다고 할아버지에게 한소리 듣고, 정치에 관심 안 둔다고 욕 얻어먹고, 잠재적 성범죄자가 된 것 같아 눈을 둘 곳조차 없다. 가끔 청년들을 생각해 준답시고 안쓰러운 시선으로 보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게 더 기분 나쁘다. 어디가 아픈지도 모르면서 힐링은 무슨. 옛날 이대남 윤동주가 쓴 ‘병원’의 한 구절이다. “그러나 나의 늙은 의사는 젊은이의 병을 모른다.”

그러던 이대남이 2022년 대선판에 혜성처럼 등장해 판도를 바꿔 놓았다. 지금까지 청년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한 사람으로서, 나는 이들이 자신의 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을 격하게 환영한다. 그런데 요즘 돌아가는 상황을 보니, 그들을 이끌던 지도자는 팽(烹) 당하고, 청년 문제는 의제에 오르지 않는다. 이건 충분히 예상됐던 일이다. 이대남이 자신의 정체성을 주체적으로 획득한 것이 아니라 기존 정치 세력에 이용당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대남이 기왕 우리 사회의 중심에 등장했으니, 나는 이번 기회에 우리 사회를 바꾸고 역사를 이끄는 주체로 우뚝 서기 원한다. 여기 ‘주체’라는 말은 자기중심적이거나 이기적이 되라는 말이 아니다. 상사의 눈치 보지 않고 칼퇴근하고, 억지로 술자리에 참석하기를 거부하고, 따질 걸 따질 줄 아는 사람이 되라는 게 아니다.

진정한 자기를 발견하고 그 확신으로부터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것이다. 기성세대가 이루어놓은 세계를 물려받아 거기에 안주하면 안 된다. 지루한 인생이 될 뿐이다. 그 세계에 내 자리가 없다고 주눅 들 것이 아니다. 저 높은 곳에 우뚝 서서 나를 비참하게 만드는 현실을 비웃으며 새로운 세상을 상상하자. 그 상상들이 서로 부딪히고 깎여나가고 연대하여 물줄기를 이룰 때 세상은 바뀐다. 언제나 그랬듯 청년이 그 중심에 서는 것이다.

주체적인 자아가 세워지기 위해서 보통 두 가지의 과정을 겪는다. 하나는 시대를 누르는 고통의 원인을 깨닫고 이에 저항하는 것이다. 구한말 청년들은 봉건적인 삶의 방식과 일제의 압박 속에서 고통당하는 자신과 세상을 발견했고, 민주화 세대는 자본주의의 질곡과 모순을 깨달았다. 이대남에 앞서 이대녀가 가부장제의 억압에 저항하며 자신의 언어로 말하는 법을 배웠고, 뒤이어 이대남이 자신의 눈으로 현실을 해석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억압을 깨닫는 것으로 주체성이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그 시대적 아픔을 극복하기 위해 자신을 드리는 것이 동반되지 않으면 역사의 주체로 설 수 없다. 희생을 통해 사랑의 진정성이 증명되는 법이다. 기독교적 언어로 말하자면, 소명을 깨닫고 거기에 헌신하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 십자가 지는 결단이 가능하다.

이대남이 주체성을 갖기 위해 기성세대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할 일이 없다! 본래 주체성이란 말 자체가 스스로 깨닫고 선다는 뜻이다. 일타강사에, 엄마·아빠 찬스에, 집 한 채 물려주고, 친구 관계에 인생 설계까지 다 해주다가 주체성 없는 지루한 아이들을 만들었다. 주체성을 갖는 것만은 그들의 몫으로 남겨두자. 기성세대가 할 일이 한 가지 있다면, 우리가 만든 세상에 청년을 가두지 말자. 우리의 잣대로 저들을 평가하지 말자. 자유의 영이신 성령께서 그들을 만나시도록 기도하고 있다.

장동민(백석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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