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설교] 선(線)과 벽을 넘어서



우리에겐 눈에 보이지 않는 선과 담이 존재합니다. 타인에 대한 차별과 비교 속에서 자신은 특별한 사람이 되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성서에 나타난 유대인들이 대표적입니다. 유대인들은 잘못된 선민의식 속에서 인종과 시간, 공간에 대해 성과 속을 구분지었습니다.

이방인뿐만 아니라 동포에게도 적용했습니다. 사마리아인이라 불리는 사람들은 본래 야곱 12지파의 일부였으나 앗수르의 통혼 정책으로 생겨난 반쪽 이스라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훗날 포로 귀환 시대에 예루살렘 성전이나 성벽을 재건할 때도 유대인들은 철저하게 선을 긋고 사마리아인과의 협력을 거부했습니다. 갈등은 깊어졌고 그들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은 경전(집회서)에도 기록됩니다. “내가 미움으로 증오하는 민족이 둘 있는데 첫째는 세일 사람들(에돔)이고, 둘째는 블레셋 사람이다. 세번째는 민족이라 할 것도 없는 세겜에 사는 사람들(사마리아 사람들)이다”.

랍비 엘리저는 “사마리아 사람의 빵을 먹는 사람은 돼지고기를 먹는 사람과 같다”고 가르쳤으며, “유대 사람들은 사마리아 사람들과 항아리를 함께 사용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혐오적 발언과 차별적 태도는 시간이 흘러도 무뎌지지 않았습니다.

유대인 예수님이 이런 사고나 분위기를 몰랐을 리 없었으나 인종과 관습, 종교의 모든 장벽을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넘으셨습니다. 그러나 여인은 자신에게 말을 걸어온 예수님이 누구인지 모르기에 “물 한잔 달라”고 부탁할 때 매우 퉁명스럽게 대했습니다.

9절의 ‘상종하지 아니하다’란 말은 “같은 물그릇을 사용하지 않을 정도로 너희는 우리를 무시하고 멸시하는데, 이 그릇으로 떠주면 먹겠느냐”는 뜻이 있습니다. 이런 퉁명스러움은 이 여인에게만 있는 게 아닙니다. 이 시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을 향해 나아갈 때 받는 시선이고 인식입니다. 아무리 복음을 전하려 해도 거대한 벽 앞에 서 있는 느낌을 받게 되죠. 그렇다고 선교적 책임을 포기해야 할까요.

예수님은 여인을 나무라거나 몰아붙이지 않았습니다. 그저 천천히 접근했습니다. 예수님과의 대화 가운데 그녀의 진짜 갈증이 드러났습니다. 인간사에서 상처받은 여인도 마음 깊은 곳에서 하나님을 제대로 예배하려는 마음이 있었다는 것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이 사회가, 사회의 구성원이 가지는 갈증도 이와 같습니다. 이 사회는 그 갈증을 폭력과 우상, 비윤리적인 것들로 채우려 하나 하나님 품에 안기기 전에는 결코 평화를 얻지 못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을 받아들이기 전 세속적인 것들로는 결코 갈증을 해결하지 못합니다. 그런데도 그들의 내면은 이 갈증을 끝내줄 누군가를 찾으며 기다립니다.

여인이 지닌 영혼의 갈증을 해결하려고 예수님이 일부러 찾아오셨다는 걸 알게 된 여인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인정하며 받아들입니다. 예수님과 여인 사이의 선과 벽이 허물어지는 순간이죠. 그러자 여인은 자신을 멸시하던 이웃을 그리스도의 눈으로 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전혀 변하지 않았지만 예수님처럼 그들을 위해 달려갑니다. 예수님을 닮은 그녀의 이 같은 벽을 넘는 행동은 하늘에서 이 땅까지 은혜의 물꼬가 한 번에 터져 홍수가 돼 흐르게 만들었습니다.

자신들의 우월함과 특권을 보전하기 위해 차별과 배타성이 기승을 부리는 시대에 하나님의 방법 외에 선을 지우고 담을 허무는 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들과 교회가 살아가는 터전은 ‘세상 밖이 아닌 세상 안’이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서 있는 모든 곳에서 바른 삶과 평화의 방법으로 선한 영향력을 끼치길 기대합니다.

전종찬 목사(고창중앙교회)

◇고창중앙교회는 전북 고창의 모든 주민을 목회 대상으로 삼고 마을 목회를 하는 정다운 교회다. 전종찬 목사는 17년 동안 ‘선을 넘는’ 사역을 하고 있다.
 
트위터 페이스북 구글플러스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