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년 4개월간 기도하는데 캐나다를 떠날 수밖에 없는 징조가 자연스럽게 보이기 시작했다. 교인들마저 이렇게 이야기했다. “기도해보니깐 목사님이 뉴욕으로 가는 게 하나님 뜻인 것 같습니다.” 가족들도 처음엔 결사반대하다가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라는 확신이 들었는지 생각을 바꿨다.
그해 6월 뉴욕중부교회 3대 목사로 부임했다. 주변에선 다들 우려했다. “그 교회 악명높은 장로들이 있습니다. 보통 교회 아닙니다. 가지 마세요. 제 명에 못 삽니다.” “인간관계는 상대적입니다. 하나님이 가라면 가야죠.”
주일학교 공간부족해 부모들 건축제안
"부촌에 이민자 교회 건축이 웬말이냐"
뉴욕에 도착하니 토론토 열린문교회와 건물은 물론 교세도 비슷했다. 처음부터 2명의 장로가 사사건건 태클을 걸었다. 장로 한 사람은 목회자에 대해 부정적 인식을 갖고 있었다.
“요즘 목사들, 큰 교회 오라고 하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갑니다.” “뭐라고요. 아니 이 교회가 성도가 얼마나 나오고 예배당이 얼마나 크다고 그런 소리를 합니까. 말을 함부로 하시면 안 됩니다.”
부임 이후 매년 등록 교인이 250명씩 늘기 시작했다. 3년 만에 성도가 1200명까지 불어났다. 의사와 약사만 55명이 출석했다. 뉴욕 동쪽 리틀넥에 위치한 예배당에서 2부 예배를 4부 예배까지 늘렸다. 주일학교 교육공간이 부족해서 컨테이너 4개를 놨다. 그것도 공간이 모자라 시차제로 예배를 드렸다.
1999년 어느 날 학부모들이 찾아왔다. “목사님, 이제 우리교회 건축을 합시다. 교육공간이 작아서 도저히 안 되겠습니다. 여기 180만 달러를 준비했습니다.”
롱아일랜드 올드웨스트베리의 8만4983㎡(2만5707평) 대지를 계약했다. 토지주는 미국 건축회사 회장이었다. 알고 보니 그 땅은 회장의 승마연습장이었다. 폐암 진단을 받은 그는 자신의 땅을 의미 있는 데 사용하고 싶었던 것 같다. 대출을 포함해 315만 달러를 지급했다.
그때부터 19년간 가시밭길이 시작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카운티에 건축신청을 하면서부터 교회 내 건축 반대파가 결집하기 시작했다.
“아니, 시가로 1000만 달러짜리 땅을 315만 달러에 산다는 게 말이나 됩니까. 그 땅은 분명히 하자가 있는 땅입니다. 롱아일랜드 부촌에 어떻게 이민자들을 위한 교회를 짓는다는 말입니까.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됩니다. 목사님께 항의합시다.”
교인 가운데 부동산 브로커를 하던 사람들을 중심으로 들고 일어났다. 설상가상 올드웨스트베리 카운티에서는 교인 명부를 요구했다. 자신의 지역에 얼마나 사람들이 거주하는지 확인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당시 그 지역에 거주하던 성도는 한 명도 없었다. 1만6528㎡(5000평) 이상이 돼야 집을 한 채 지을 수 있는 동네였다. 20년 전 주택 최저 가격이 200만 달러를 웃돌던 부촌이었다. 당연히 동양의 이민자들이 들어오는 걸 좋아할 리 없었다.
정리=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