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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이건숙 (21) 군용 가방공장 취직… 시각장애인 틈에서 재봉틀과 씨름
소설가 이건숙(왼쪽) 사모가 1971년 미국 필라델피아의 출석 교회에서 남편 신성종 목사와 두 아들을 안고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미국 필라델피아에 와있던 유학생 부인 셋이서 직장을 구하러 다운타운으로 나갔다. 도시락으로 감자를 삶아 핸드백에 넣고 셋이서 무조건 직장 구하기 작전에 뭉쳤다. 1960년대 한국은 너무 가난했다. 얼마 안 되는 유학생과 그 아내들은 모두 막노동을 해야 할 지경이었다. 아침 집을 나설 적에 남편 신성종 목사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당신 무조건 ‘예스, 아이 캔’(Yes, I can)이라고 대답해. 그래야 능력이 있다고 인정하...
입력:2022-03-08 14:10:01
[역경의 열매] 이건숙 (20) 산욕열로 죽을 고비 넘긴 후 유학간 남편 따라 도미
소설가 이건숙 사모의 아들을 돌봐주신 친정어머니가 1969년 서울 정릉의 아파트 앞에서 손자를 안고 있다. 시어머니는 17세에 남편 신성종 전도사를 낳았지만, 나는 서른이 가까운 노산이었다. 그런데도 시어머니의 충고를 따라 기저귀도 빨고 찬물에 목욕도 했다. 하루는 학교에서 돌아온 남편이 혼수상태에 빠져 누워있는 나를 보고 장모에게 전화했다. 일이 이렇게 되니 오빠는 어쩔 수 없이 친정어머니를 내게 보내면서 투덜댔다. “이러다가 내 동생 죽이겠다. 어쩔 수 없지. 어머니가 가서 돌볼 수밖에 없네요.” 급히 간 병원의 진단은 산욕열이었다. ...
입력:2022-03-07 14:10:02
[역경의 열매] 이건숙 (19) 고단한 생활에 영양부족으로 2.2㎏ 작은 아이 출산
소설가 이건숙 사모와 신성종 목사의 1967년 서울 충현교회 결혼식 기념사진. 서울 사당동 총신대는 ‘헐떡고개’라고 부를 정도로 가파른 곳에 있었다. 아스팔트가 깔리지 않은 진흙 길이라 비라도 오는 날이면 구두끈만 남겨놓고 온통 진흙으로 뒤범벅이 될 정도였다. 누가 보면 간첩이 산야를 헤맨 것 같다고 의심할 지경이었다. 쌀을 봉지로 사 나르면서 주로 밑반찬으로 살아가야 했다. 시누이와 남편 신성종 전도사의 등록금을 내고 살자니 무조건 아껴야 했다. 고추를 소금에 삭혀 잘게 썰어 먹고, 꼴뚜기를 상자째 사다가 소금에 삭혀 그걸 한두 ...
입력:2022-03-06 14:10:02
[역경의 열매] 이건숙 (18) 유학 떠나게 된 신 전도사, 약혼부터 하자고 막무가내
소설가 이건숙(오른쪽) 사모가 1967년 서울 충현교회에서 열린 결혼식에서 남편 신성종 목사와 행진하고 있다. 어머니는 신성종 전도사의 가정을 파악하기 위해 집배원을 따라 어렵게 달동네에 사는 그의 집을 방문하고는 기절할 정도로 놀라셨다. 결혼은 절대 아니라고 못을 박았다. 그렇게 가난한 가정을 본 적이 없다고 어머니는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그럴 즈음 신 전도사는 미국 국무부 초청으로 왕복 비행기 삯과 2년간 모든 학비와 식비를 받고 유학을 떠나게 됐다. 그러자 약혼을 하고 떠나겠다고 강하게 주장하기 시작했다. 그 시험에 합격한 사람은 딱 ...
입력:2022-03-03 14:10:02
[역경의 열매] 이건숙 (17) 사윗감 반대하던 어머니 “귀가 커 장수는 하겠네”
소설가 이건숙(오른쪽) 사모가 1965년 서울의 한 음식점에서 신성종 목사와 약혼식 도중 인사하고 있다. 대학 졸업 후 충남 논산여고에 배치돼 부임했다. 1963년도엔 취직이 하늘의 별 따기였다. 서울사대에서 학비를 싸게 받고 공부를 시킨 대신 배치된 학교에서 3년을 근무하는 것이 의무였다. 논산여고는 연무대가 가까워서 훈련병들이 많았다. 군인들의 도시이기에 여학교는 학생들 보호에 만전을 기했다. 방과 후엔 선생님들이 조를 짜서 논산극장과 시내를 순찰하며 학생들을 감시했다. 여학생들은 어찌나 영화 보기를 좋아하는지, 논산극장에 들어가보면 어머...
입력:2022-03-02 14:05:03
[역경의 열매] 이건숙 (16) 친구 따라 성가대 가입… 유치부서 찬송·율동 가르쳐
소설가 이건숙(앞줄 왼쪽) 사모가 1957년 서울대 사범대 재학 중인 정신여중고 동문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정신여고 시절엔 서울 미아리 천막 교회에 다녔고, 대학교 1학년부터 다닌 교회는 동도교회였다. 1959년 청량리는 그냥 시골이었다. 서울대 사범대학은 당시 용두동에 있었고 나는 학교 근처에서 살고 있었다. 고등학교 단짝이 나를 그 교회로 데려갔다. 성가대가 그때 처음 조직돼 나도 친구를 따라 성가대에 섰다. 교인들은 가마니 바닥에 앉아서 예배를 드렸고, 최훈 강도사님이 목회하고 있었다. 청량리 시장 곁에 있어 몹시 가난한 동네 교회였다. ...
입력:2022-03-01 14:10:01
[역경의 열매] 이건숙 (15) 슈바이처처럼 의료선교 꿈꾸다 “험난하게 여자가…”
소설가 이건숙(왼쪽 세 번째) 사모가 서울대 사범대 재학 중이던 1960년 서울 동도교회 교회학교 아이들과 소풍을 떠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나의 제복 시절 꿈은 오직 하나였다. 의사가 되고 싶었다. 정신학교 근처에는 서울대학병원과 의과대학이 있었다. 그 앞을 지날 적마다 하얀 가운을 입어 눈에 띄는 의사들과 학생들 모습은 나를 황홀하게 만들었다. 나는 이과로 가서 의대를 목표로 공부를 했다. 급우들은 거의 이화여대나 숙명여대 쪽으로 지원해 서울대, 특히 의대의 시험 과목과 완전히 달랐다. 이과에서 3명이 의대를 가려고 준비했다. 한 사람은 서울 ...
입력:2022-02-28 14:05:03
[역경의 열매] 이건숙 (14) 성경과 내 삶을 연결… 문학적 기초 닦은 여고시절
기독 여성 교육에 힘쓴 서울 종로구 옛 정신여학교 본관 건물. 국민일보DB 나는 학교도서실 책들을 조금이라도 자투리 시간이 나면 열심히 읽었다. 비 오는 날이나 험한 날씨엔 교실에서 체육 수업을 했다. 정말 재미없었다. 그런 날은 소설을 책상 밑에서 감추고 읽곤 했었다. 한번은 심훈의 ‘상록수’ 끝부분을 읽다가 도저히 참을 수 없어 흐느끼고 말았다. 당황한 체육 선생님은 어디가 아프냐고 다가왔고 내가 소설을 읽다가 우는 것을 안 급우들은 배가 아파 운다고 합창해서 양호실로 쫓겨나 아픈 척 몇 시간을 누워 있던 적도 있었다. 눈코 뜰 새 ...
입력:2022-02-27 14:10:05
[역경의 열매] 이건숙 (13) 철저한 신앙훈련으로 10대의 나를 예비하신 주님
소설가 이건숙(오른쪽) 사모가 1957년 서울 정신여고 교정에서 친구 손을 잡고 계단에 서 있다. 정신여중에 들어가서야 친구들 대부분이 장로나 목사 딸인 걸 알게 됐다. 부모가 교회에 나가는 크리스천 가정에서 이 학교를 선택해 보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하나님은 10대 초반에 나를 여기에 데려다 놓고 장차 쓸 인물로 훈련을 시키셨다. 그 당시에는 그걸 모르고 고등학교는 반드시 경기여고로 가서 오빠에게 보란 듯이 고개에 힘을 주겠다는 결심을 하기도 했었다. 정신여중·고는 아무래도 하나님의 딸들이 모인 곳이라 다정한 분위기였다. 여기서 나는 ...
입력:2022-02-24 14:10:02
[역경의 열매] 이건숙 (12) “그 학교 떨어진 건 기적… 하나님의 큰뜻 있는 듯”
소설가 이건숙(오른쪽) 사모가 1955년 서울 정신여중 교정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6·25전쟁 당시엔 부서진 창고에서 가마니를 깔고 모두 양반다리를 하고 공부했다. 피난 시절 초등학생이었던 나는 1년 반을 월반하여 6학년이 되었다. 피난민들 틈에 끼어 학업을 중단하고 있다가 내 나이에 맞게 뛰어오른 셈이다. 구구단을 배우지 못하고 6학년에 들어갔으니 산수 시간은 곤혹 그 자체였다. 오빠는 내가 구구단을 못 외운다고 어찌나 머리에 알밤을 먹이는지 머리가 온통 부어올랐다. 3살 위의 오빠는 자신도 월반해서 힘든 판에 내가 가르쳐달라고 자꾸 ...
입력:2022-02-23 14:05:02
[역경의 열매] 이건숙 (11) “여자도 많이 배워야”… 남다른 어머니의 교육열
소설가 이건숙(왼쪽) 사모가 1962년 막냇동생 졸업식에서 어머니(오른쪽)와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어릴 적 내 집은 늘 책을 읽는 분위기였다. 아버지 서재는 마치 도서실 같았고 어머니는 공부방에 내 나이에 맞는 책들로 채워 주셨다. ‘피터 팬’을 읽고 며칠 밤을 자지 못하고 밤에 창문을 열어놓고 주인공을 기다렸던 유년의 숲이 그립다. 그림자를 두르르 말아 칼로 잘라먹는 마귀할멈 이야기는 얼마나 공포심을 안겨주었던지! 나이든 지금도 어둠이 내리면 그 비슷한 무서움이 불시에 엄습한다. 그 당시 방학 책은 우툴두툴 흑색지라 지우고 ...
입력:2022-02-22 14:10:01
[역경의 열매] 이건숙 (10) 신앙 두텁고 다재다능 어머니… 자녀 교육에 전심전력
소설가 이건숙(왼쪽) 사모가 1963년 서울대 사범대 졸업식에서 어머니와 함께 서 있다. 어머니는 아버지보다 머리가 좋고 총명한 분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붓글씨도 명필이라 전시회에 가끔 출품도 했다. 지금도 우리 형제들 집에는 병풍 액자 족자 심지어 도자기에 쓴 글들이 유물로 남아있다. 뜨개질도 잘해서 내 옷을 시집간 뒤에도 조끼랑 덧옷까지 손수 떠서 입혔다. 눈이 아주 안 보일 때까지 내가 출판한 책이나 사위가 낸 책 모두를 한 권도 빠짐없이 읽고 평을 하셨던 분이다. 어머니는 한문을 혼자 공부해 터득했고 일찍부터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교회에 ...
입력:2022-02-21 14:05:02
[역경의 열매] 이건숙 (9) 유치원 일찍 들어갔다가 아버지의 애물단지 되다
소설가 이건숙(앞줄 오른쪽 두 번째) 사모의 1944년 가족 사진. 뒷줄이 아버지와 어머니다. 아버지는 밀수업자들을 맡은 검사라 무엇이 그리 위험한지 베개 밑에 권총을 감추고 주무셨다. 안방에서 아버지 어머니 옆에 막내 남동생이 눕고 나란히 나와 오빠가 누워서 잤다. 부엌일 하는 처녀는 다른 방에서 자고 진돗개와 더불어 송아지만큼 큰 개가 집을 지켰다. 초등학교 1학년 때인데 적산가옥인 안방 창가에 자색 목련꽃이 핀 봄날이었다. 머리맡 요강에서 오줌을 누던 나는 목련꽃 옆에 서서 방안을 엿보는 검은 모자를 쓰고 검은 천으로 입을 가린 남자를 보았...
입력:2022-03-16 20:55:44
[역경의 열매] 이건숙 (8) “누가 너더러 교회 나가라고 했어” 호통치며 볼기짝
소설가 이건숙 사모가 1941년 첫 돌에 촬영한 기념 사진. 오른쪽은 판사가 된 오빠. 내 유년의 숲에 보이는 아버지의 서재는 바닥부터 천장까지 사면이 책으로 꽉 차 있었다. 책 좋아하고 낙천적인 아버지였다. 법조인 중에서도 검사였다. 그가 산 시대는 가장 격렬한 전쟁을 통과하는 불운의 시대였다. 아버지는 굉장히 가정적이어서 휴일이면 가족들을 데리고 산속의 호수나 냇가로 가서 낚시를 했다. 지독한 낚시꾼으로 신혼 첫날밤 신혼부부가 사라져서 할머니는 일꾼들과 함께 횃불을 들고 찾아다녔더니 깊은 산속 호숫가에서 신랑이 신부를 곁에 앉혀놓고 낚...
입력:2022-02-17 14:05:03
[역경의 열매] 이건숙 (7) 새벽엔 작품 구상, 모두 잠든 후엔 번개 같은 집필
소설가 이건숙(뒷줄 왼쪽) 사모가 2006년 남편 신성종 목사 및 충현교회 장로였던 김영삼 대통령 내외와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문제 있는 교회만 맡아서 목회하는 남편 신성종 목사는 언제나 내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하나님이 쓰시는 스페어타이어야. 문제 있는 교회를 맡아서 해결하면 떠나서 또 다른 문제 있는 교회로 옮겨야 해.” 어떤 때는 견딜 수 없이 너무 힘들어서 나도 따지고 든다. “그러면 어쩌자고 식구들 다 고생시키면서 40세까지 미국에서 그렇게 힘든 공부를 했어요.” “그래서 목회하면서 그렇게 받은 박사학...
입력:2022-02-16 14:05:03
[역경의 열매] 이건숙 (6) ‘문맥’ 동인 결성… 고된 훈련이지만 악착같이 배워
소설가 이건숙(가운데) 사모가 지난해 12월 서울 종로구 수운회관에서 열린 2021 PEN문학상 시상식에서 소설부문 상을 받고 있다. 하나님께서 풀어가는 세 번째 단계는 ‘문맥’ 동인 결성이었다. 40대에 소설을 쓰기 시작한 늦깎이들의 모임이었다. 정건영 김용철 신상성 류순하 등 전부 남자였고 나 혼자만 여자였다. 모두 국문학을 전공한 선생님들로 지금은 소설가로 잘 알려진 분들이다. 매달 단편을 써서 각자의 작품을 놓고 토론하고 각 가정을 돌면서 모이기도 했다. 얼마나 작품 비평이 거셌는지 어떤 때는 화가 치밀어 힘들었으나 나로서는 배우...
입력:2022-02-15 14:10:02
[역경의 열매] 이건숙 (5) 소설가로 세우신 주님 뜻 깨달으며 문학세계에 첫발
소설가 이건숙(왼쪽 네 번째) 사모가 1986년 소설가 박완서(맨 오른쪽) 윤남경(오른쪽 세 번째) 작가 등과 함께 여성 문인 성경반 모임을 하고 있다. 신춘문예로 등단은 했지만, 그때까지 문학을 연구하고 공부한 적이 없었다. 좋아서 읽은 문학 작품들 말고는 전문적 훈련을 받지 않았다. 대학 시절 독문학을 했다지만 원문으로 독일 소설을 읽느라고 사전을 끼고 살았던 기억뿐이다. 그런 나를 하나님은 우선 소설가로 세워놓고 앞을 막고 있는 난관을 돌파하도록 몰아가셨다. 고된 훈련 기간이었다. 네 단계의 문을 통과하면서 하나님이 나를 소설가로 세우기 위...
입력:2022-02-14 14:10:02
[역경의 열매] 이건숙 (4) 상금이나 받고 끝날 줄 알았던 공모… ‘소설가’ 이름 달다
소설가 이건숙(왼쪽) 사모가 1986년 직행버스 앞에서 박완서 작가와 서 있다. 박 작가는 사역에 매인 이 사모가 딱하다며 종종 여행길로 이끌었다. 신문사의 면담 요청을 받고 나는 팔십만원을 받을 욕심에 들떠있었다. 혼자 가기 쑥스러워 옆에 살고 있는 선배 언니와 함께 한국일보사에 갔다. 언니랑 돈을 받아 바로 국제가구로 갈 참이었다. 그런데 으리으리하게 큰 사무실에 들어서면서 나는 잔뜩 주눅이 들었다. 문화부장 앞에 앉으니 기자들이 사진을 찍고 야단이다. 겁이 난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어서 그의 주머니에서 돈이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문화부...
입력:2022-02-13 14:05:03
[역경의 열매] 이건숙 (3) 신춘문예 당선 전화에 “신난다, 호두나무 장롱 산다”
소설가 이건숙(오른쪽) 사모가 1981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상식에서 가족들과 함께 서 있다. 맨 왼쪽이 남편 신성종 목사. 목사의 아내가 어떻게 소설가가 되었는가.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당선할 당시 내 생활은 정말 가난의 구렁텅이였다. 시부모 생활비, 시동생 둘의 대학등록금, 그리고 우리의 생활비까지. 남편이 벌어오는 돈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웠다. 몽땅 그달 월급을 봉투째 바쳐도 모자라 동네를 돌면서 돈을 꾸러 다녀야 했다. 초등학교에 다니던 아이들은 겨울 간식인 사과를 먹고 싶다고 야단이지만 그걸 살 돈이 없었다. 어쩌다가 딱 한 알, 사과를 사 ...
입력:2022-02-10 14:05:02
[역경의 열매] 이건숙 (2) “목사 사모가 소설 작가라니…” 불평과 충고 이어져
소설가 이건숙(앞줄 왼쪽 세 번째) 사모가 1989년 옛 소련 모스크바에서 열린 국제펜클럽대회에 참석한 문인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목사의 아내가 소설을 쓴다니 지청구도 많이 들었다. 사모란 남편의 뒤에 있는 듯 없는 듯 숨어 살아야만 한다는 보수 교단 풍토에서 소설을 쓴다니 부닥치는 저항은 아주 거셌다. 특히 작가들 사이에서도 친해지면 은근히 다가와 아픈 충고를 했다. “이건숙씨, 이번 글도 또 하나님이 어떻게 했다는 결론을 지었지. 그러니 작품성이 없잖아. 문학은 종교성을 띠면 끝장이라고.” 어느 땐 하나님을 믿지 않는 평론가가 신랄...
입력:2022-02-09 14:05:03
[역경의 열매] 이건숙 (1) 등단 40년 만에 PEN문학상 ‘모두 하나님의 계획’
소설가 이건숙 사모가 지난달 26일 서울 서대문구 자택 서재에서 40년 넘게 기독교 문학에 집중한 여정을 말하고 있다. 신석현 인턴기자 문단에 소설가란 이름을 달고 등단한 지 꼭 40년 만에 2021 PEN문학상을 받았다. 수상작인 단편집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구멍’을 심사한 김지연 김유조 소설가는 심사평에서 “남편과 외동딸을 구멍 속에 넣어 묻어버린 뒤에 엄습한 구멍 공포증에서 마침내 벗어나 진짜 아름다운 구멍인 영생의 장소, 천국을 갈망하는 인간의 갈구가 그려져 있는 깊은 사유와 성찰의 내면 심리가 꼼꼼히 기록돼 있다”고 ...
입력:2022-02-08 14:05:04
[역경의 열매] 김의식 (20·끝) 나에게 맡겨진 치유의 사명, 충성 다할 수 있기를…
김의식(오른쪽) 목사가 2020년 서울 강서구 치유하는교회에서 국민일보목회자포럼 대표회장에 취임한 후 직전 대표회장 이철 목사와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나는 만 20세의 나이에 죽음의 위기에서 하나님의 종으로 소명을 받은 후 어떠한 인간적인 목표도, 계획도 없이 살아왔다. 그저 주님께서 쓰시겠다고 하시면 ‘덤으로 사는 인생, 언제든 나의 목숨까지도 바치겠다’는 믿음을 가지고 십자가의 주님과 맡겨 주신 영혼들만 바라보면서 모든 열정을 쏟으며 달려왔다. 내가 혼신의 열정을 쏟은 곳은 가장 먼저는 치유하는교회의 치유 목회이고, 둘째는 치유...
입력:2022-02-07 14:05:03
[역경의 열매] 김의식 (19) 부회록 서기로 총회 임원 첫발… 한국교회 위해 헌신
김의식(오른쪽 두 번째) 목사가 2015년 충북 청주 상당교회에서 열린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제100회 총회에서 부회록서기에 오른 후 임원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주님은 나의 목회 여정에 늘 동행해주셨지만 총회에서 임원으로 섬길 수 있었던 것도 하나님의 큰 은혜였다. 2015년 대한예수교장로회(예장) 통합 총회 제100회 총회장이신 채영남 목사님께서 부족한 종을 부회록서기로 불러주셔서 처음으로 총회 임원으로 섬기게 됐다. 채 목사님은 전에 듣고 알았던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영성이 깊으셨고 총회 주제인 ‘주여, 화해하게 하소서!’에...
입력:2022-02-06 14:05:04
[역경의 열매] 김의식 (18) 한국교회에 치유 목회 접목… 해외에서도 크게 부흥
김의식(앞줄 왼쪽 열 번째) 목사가 2019년 서울 강서구 치유하는교회에서 파송 선교사들을 초청해 선교대회를 열고 있다. 나는 치유 목회가 한국교회에 접목되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교회마다 크고 작은 불화와 분쟁으로 많은 고통을 겪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2013년부터 전국 목사·사모 초청 치유 목회 세미나를 시작했다. 또 2년 간격으로 호남 영남 충청 강원 지역에서 농촌 전도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더 나아가 지금까지 ‘만(1만명 성도 출석), 천(1000명 사역자 양육), 백(100명 선교사 파송), 십(10개 교회 개척)의 비전’을 따라 교회 개척과 농어...
입력:2022-02-03 14:05:04
[역경의 열매] 김의식 (17) 새 성전 ‘치유하는교회’ 입당… 나잇대별 맞춤 목회 펼쳐
2012년 완공된 서울 강서구 치유하는교회 예배당 전경. 김의식 목사는 전 세대에 치유 목회를 접목해 교회 부흥을 일궜다. 10년의 영적 전쟁 속에서도 교회는 기적적으로 부흥해 성도 수가 갑절에 이르렀다. 당시 700석의 예배당과 300석의 소예배실로는 주일 5부 예배까지 드려도 성도들의 수용이 어려웠다. 뿐만 아니라 예배당 건축 후 30년이 지나서 교회당 건물이 낙후돼 비가 오면 누수 현상이 있었고 지하 교육관에는 곰팡이까지 생겼다. 그래서 당회에서 만장일치로 새 예배당 건축을 결의하고 교회 옆의 주택까지 매입했다. 2010년부터 2년 6개월에 걸쳐 현재...
입력:2022-02-02 14:05: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