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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유동부 (11) 언제나 주님 사랑으로 품어준 목사님과 교회공동체
유동부 대표와 그의 아들 태정씨가 강원도 춘천시의 유동부치아바타 매장에 적힌 ‘부활’ 문구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있다. 태정씨는 현재 유동부치아바타에서 생산팀장으로 재직 중이다. 사업의 실패 등 부침을 겪으며 춘천한마음교회 김성로 목사님과 교회 공동체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그들은 내가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언제나 힘을 주며 예수님의 사랑으로 날 품어줬다. 2004년 제과점 사업이 부도가 났을 때도 교회 공동체는 내 어려움을 보고만 있지 않았다. 상한 마음을 안고 참석한 어느 예배 시간이었다. 김 목사님은 설교 중에 “유동부 ...
입력:2021-08-02 14:05:02
[역경의 열매] 유동부 (10) “영혼이라도 팔아 월세·전기세·인건비 해결된다면…”
유동부 대표가 2014년 다시 일어서기 위한 사업을 구상했던 한 교회 지인이 운영하는 춘천교대 내 카페 전경.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명확히 가슴에 새기며 신앙은 한층 더 성숙해졌지만, 여전히 실제 삶은 녹록지 않았다. 2008년 6월 즈음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야탑동에서 조그맣게 조각 케이크 제조업을 시작했다. 6번째 도전이었다. 당시 아내는 꽁꽁 언 케이크를 무리하게 자르느라 손목에 무리가 많이 갔고 그로 인해 지금도 무거운 물건을 들 때면 손목이 아플 만큼 고생을 하고 있다. 6번이 넘는 사업 실패의 과정을 겪으며 지긋지긋하게 월세, 인건비, 관...
입력:2021-08-01 14:05:02
[역경의 열매] 유동부 (9) 결정적 증거 ‘예수 부활’로 확실한 믿음의 눈 열려
유동부 대표가 찾은 한 중학교 교과서 사회과 부도 속 ‘세계 연대표’에 BC 4년 ‘크리스트 탄생’이라고 적힌 모습(동그라미 안). 아래는 한 고등학교 세계사 교과서 속 ‘크리스트교의 성립과 전파’란 단원을 유 대표가 밑줄을 그어가며 읽었던 흔적. 중고 서점에서 중학교 교과서 사회과 부도를 구입해 펼쳐봤다. 책 속 ‘세계 연대표’에 우리나라는 삼국시대였던 BC4년 ‘유럽에서 크리스트(예수) 탄생’이라고 떡하니 적혀 있었다. 그때 알았다. 그동안 난 한 번도 자문해 본 적 없이, 무의식중에 예수...
입력:2021-07-29 14:05:03
[역경의 열매] 유동부 (8) ‘예수 부활’이 유일한 증거? 이유 궁금해 미칠 것 같아
유동부(왼쪽) 대표가 지난해 10월 그의 영적 스승인 김성로 춘천한마음교회 목사님과 함께 찍은 사진. 2001년 경기도 성남에서 우유 대리점 사업을 할 때다. 내가 부활의 증인이 된 잊을 수 없는 해다. 그해 나는 춘천한마음교회 청년, 대학생 친구들과 함께 수련회에 참석했다. 수련회 주제 말씀은 요한복음 2장 22절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 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였다. 예수님의 부활이 역사적 사건이라는 수련회 주제는 우리 모두에게 신선한 충격을 안겨줬다. 목사님은 “예...
입력:2021-07-28 14:10:02
[역경의 열매] 유동부 (7) 연이은 사업 실패로 ‘투잡’ 뛰며 피나는 고통의 삶
유동표 대표가 1995년 서울 구로구 구로동에서 책 대여점을 할 당시 아내와 아들 모습. 유 대표는 당시 아내가 자신의 사업을 뒷바라지하느라 고생이 많았다고 회상했다. 1993년 6월 경기도 광명시에서 첫 사업으로 제과점을 시작했으나, 경험 부족 등으로 실패했다. 이듬해 3월 서울시 구로구 가리봉동에서 ‘거목상회’란 이름으로 작은 슈퍼마켓도 열어봤지만, 이마저도 여의치 않았다. 95년 7월 즈음 인근 구로동에서 세 번째로 시작한 책 대여점 사업과 경기도 성남시로 자리를 옮겨 문을 연 우유 대리점 사업까지…. 실패의 연속이었다. 사업을 ...
입력:2021-07-27 14:05:04
[역경의 열매] 유동부 (6) 첫 사업과 결혼, 모든 게 잘 풀리나 싶더니…
유동부 대표가 1996년 경기도 성남시의 한 우유 대리점에서 우유 배달을 할 당시 목장 견학을 갔다가 첫째 아들, 아내와 함께 사진을 찍었다. 김성로 목사님께 양육을 받으며 구원의 확신, 기도 응답의 확신을 얻었다. 당시 목사님 메시지는 어두운 세상 가운데서 빛의 세계를 경험하게 하는 놀라운 성령의 역사였다. 마치 그의 눈에선 불이 나오는 듯해 뜨거웠다. 금방이라도 세상을 빛의 세계로 바꿔 버릴듯한 그 힘은 지금 생각해도 전율이 느껴질 정도다. 목사님 스스로는 권위를 내세우지 않으셨지만, 난생 처음 접하는 불같은 성령의 능력 앞에 우리 모두 굴복됐...
입력:2021-07-26 14:10:02
[역경의 열매] 유동부 (5) 암흑 같은 시절 안식처 돼 준 교회서 하나님 만나
유동부 대표가 1990년 초 당시 출석했던 서울 구로구 동천장로교회 청년회 모임에 참석한 모습. 앞줄 왼쪽에서 네 번째가 유 대표다. 철공소에서 생활하던 때나 빵 제조 기술을 어깨너머 조금이라도 배우려 기웃하던 당시는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을 정도로 암흑 같은 시절이었다. 상식과 예절 등 살아가는 데 필요한 기초를 배우고 사람의 기본이 되는 인격을 올바로 형성해야 할 시기였음에도 난 그저 생존을 위해 이리저리 굴러다녔다고밖에는 표현이 안 된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날 안타깝게 여기셨는지 1988년 열아홉 살이란 비교적 이른 나이에 만나주셨다. ...
입력:2021-07-25 14:05:04
[역경의 열매] 유동부 (4) 내 인생 송두리째 바꾸게 될 제과·제빵과의 첫 만남
유동부 대표가 지난 6월 18일 강원도 춘천의 사업장에서 치아바타 빵에 들어가는 원재료를 설명하고 있다. 빵 제조 기술을 배우려 새벽같이 일어났던 그의 숱한 노력과 기도가 그를 지금의 자리로 이끌었다. 춘천=신석현 인턴기자 공장에서 일한 지 1년쯤 지나고 2년제의 비인가 야간고등학교에도 진학했다. 하지만 그저 졸업장이라도 따는 것이 목표였을 뿐 공부엔 관심이 없었다. 출석 도장만 찍는 것에 의의를 두고 공부는 뒷전이었다. 1987년 열여덟 살이 된 난 이제 어느 정도 첫 직장에서의 일도 손에 익었겠다, 소자본으로라도 나만의 장사를 하고 싶은 마음이 ...
입력:2021-07-22 14:05:03
[역경의 열매] 유동부 (3) 칠·용접 등 닥치는 대로 기술 배우며 홀로서기 시작
1989년 즈음 스무 살이던 유동부(맨 오른쪽) 대표가 춘천한마음교회 청년부 친구들과 함께 찍은 사진. 당시 친구들은 대학 신입생이었지만, 유 대표는 빵집에서 일할 때였다. 1985년 즈음 열여섯의 나이로 서울에 홀로 올라왔다. 산업화가 한창이던 당시는 지방에서 올라와 서울로 모여든 이들이 전봇대마다 부착된 구인광고를 보고 취직하던 일이 자연스러울 때였다. 나도 서울로 일단 올라가기만 하면 먹고는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외삼촌이 살던 구로구 가리봉동에 거처를 잡았다. 그곳에서 며칠을 머물며 이따금 인근 구로공단에 나가 일할 만한 곳을 찾았다. 마...
입력:2021-07-21 14:05:04
[역경의 열매] 유동부 (2) 열여섯 어린 나이에 가정 폭력 피해 홀로 서울행
유동부 대표가 2003년 7월 강원도 춘천의 한 호텔 앞에서 가족들과 함께 사진을 찍었다. 부인 박순정씨와 아들 태정, 딸 은진씨. 태정씨는 현재 유동부치아바타 제품개발생산팀장을 맡고 있다. 난 전남 보성군 벌교읍에서 삼 형제 중 둘째로 태어났다. 유년기는 그다지 좋은 기억은 없다. 폭력적인 아버지 밑에서 자란 탓이다. 아버지께선 별다른 직장 없이 떠돌이 생활을 많이 하셨던 거로 기억한다. 술도 술이지만, 방랑벽이 심하셨던 듯하다. 아버지는 집엔 자주 안 들어오셨지만, 이따금 집에 오시면 툭하면 어머니는 물론이고, 우리 삼 형제를 때리곤 하셨다. 그 ...
입력:2021-07-20 14:05:04
[역경의 열매] 유동부 (1) “암 투병 아들이 먹어도 될 건강한 빵 만들자”
유동부 대표가 지난 6월 18일 강원도 춘천시 동내면의 사업장에서 치아바타 빵 제조 공정을 설명하고 있다. 춘천=신석현 인턴기자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생활 전선에 뛰어들었다. 스물다섯 살부터 제과점, 슈퍼마켓, 책 대여점, 우유 대리점, 2번째 제과점, 식품제조업, 제과점 카페까지 연속으로 7번 사업에 실패하다 보니, 돈 문제만 깔끔하게 해결된다면 영혼이라도 팔고 싶었다. 2014년 3월, 마지막 사업이 무너지던 때 군 생활 8개월째 되던 아들은 흉선암을 선고받고 수술 후 방사선치료를 받기 시작했다. 아내와는 떨어져 살 수밖에 없었고, 오갈 곳이 없었던 나...
입력:2021-07-19 14:05:02
[역경의 열매] 이장식 (30·끝) 평생을 후학 위해 강단에 서… 이들 좋은 목회자 되길
이장식 교수와 박동근 사모가 경기도 화성시 ‘광명의 집’ 앞마당에서 난간에 기댄 채 미소 짓고 있다. 케냐에서 돌아와 무료한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 하나님께선 내게 마지막 봉사의 자리를 주셨다. 논쟁과 다툼이 많은 한국 개신교계에서 초교파적으로 신학자들을 규합해 신학연구소를 개설했다. 우린 매년 2회씩 연구지를 출판했고, 연구소는 에큐메니컬 신학연구소로 발전하게 됐다. 이 신학연구소는 내 호를 따 ‘혜암신학연구소’라 이름 붙여졌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내 나이 100세가 됐다. 죽음의 공포가 가장 심했던 지난 한 세기를 뜻 있...
입력:2021-07-18 14:05:02
[역경의 열매] 이장식 (29) 케냐서 15년 사역 마치고 안식처 ‘광명의 집’으로 귀국
이장식 교수 아내 박동근 사모가 케냐 키무리던 유치원 원아들과 함께 찍은 사진. 유치원 원아가 늘면서 아내는 유치원 독립 건물을 지을 필요를 느꼈다. 약 4만5000달러의 비용을 들여 유치원 교사를 우리 집 가까운 곳에 지었다. 석조 건물에 기와를 얹은 한국식 유치원이었다. 유치원 건물 정초석에는 아내가 이 유치원을 설립하고 지었다고 기록돼 있다. 유치원 이름은 지역 이름인 키무리(Kimuri)에 ‘Dawn(새벽)’을 붙였는데, 이는 아내의 이름에 들어가는 동녘 동(東)과 뜻이 통한다. 나와 아내는 아프리카 땅에서 단순한 외래 선교사가 아니라 이곳 공...
입력:2021-07-15 14:05:03
[역경의 열매] 이장식 (28) 목회자 양성 위해 신학교 짓다 교단 재정 어려워져
이장식(아랫줄 왼쪽에서 세 번째) 교수와 박동근(아랫줄 맨 왼쪽) 사모가 PCEA신학교 제자 및 동료들과 함께 찍은 사진. 동아프리카장로교회(PCEA) 총회장 무인디 목사와 증경 총회장 키옹고 목사, 직전 총회장이면서 신학교 학장이던 완자우 박사 등을 1992년 봄 우리 집에 초대한 적이 있었다. 이들과 함께 오찬을 즐기던 중 무인디 목사가 갑자기 말을 꺼냈다. PCEA교회가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와 선교 동역자 관계를 맺고 싶다며 내 의견을 물었다. 난 두 교단이 함께 협력하면 선이 되겠다 싶었다. 난 곧바로 무인디 목사의 말을 편지로 당시 기장 총회장인 ...
입력:2021-07-14 14:05:03
[역경의 열매] 이장식 (27) 교회사 강의로 본격 사역… 후원자들에 선교 서신 보내
이장식 교수 부부가 케냐 도고토 동아프리카장로교회 교단 신학교 교수로 있으면서 머물렀던 집. 이 교수 부부 뒤로 이들의 발이 돼준 자동차가 보인다. 케냐 입국 후 나와 아내는 당분간 나이로비에 있는 성공회교회에 속한 여인숙에 머물게 됐다. 도착 이튿날 유부웅 목사가 케냐인 구미 목사를 대동하고 찾아왔다. 구미 목사는 수년 전 내가 장신대에 출강했을 때 내 강의를 들었던 사람이었다. 우린 유 목사를 따라 리무루에 있는 그의 사택에 가서 유 목사가 가르치고 있다는 성바울 신학대학을 방문했다. 그곳에서 교수 몇 분과 인사를 나눴다. 기억나는 건 이 ...
입력:2021-07-13 14:05:04
[역경의 열매] 이장식 (26) 정년으로 은퇴… 케냐 장로교신학교서 인생 2막 열어
이장식 교수가 1986년 한신대에서 열린 은퇴식에서 마지막 말씀을 전하고 있다. 1986년 7월 내 은퇴 시기가 다가왔다. 난 한신대로부터 명예 교수의 명칭을 얻었다. 50년 4월 한신대를 졸업하고 전임강사로 봉직한 후 지금까지 36년간 교편생활을 했다. 그중 대구 계명대에서의 재직 4년 6개월을 빼면 32년간 한신대 교수로 재직한 셈이다. 한신대 전체 교수들은 돈을 모아서 한신대학 이름과 마크를 넣은 굵직한 금반지를 선물로 내게 줬다. 난 이 반지를 항시 끼고 다니면서 교수들의 호의를 늘 되새겼다. 전국신학대학협의회에서는 내 30년 신학교육의 공을 치하...
입력:2021-07-12 14:10:02
[역경의 열매] 이장식 (25) 비기독교 학생들, 교정에 위패 놓고 돼지 삶아 절까지
한신대가 1986년 5월 27일 경기캠퍼스 교정에 세운 류동운 열사 추모비. 한신대 신학과 79학번인 류 열사는 80년 광주민주화운동에 참가했다 희생 당했다. 한신대 제공 서울에 올라온 우리 가족은 한강변에 있는 한강 맨션에 입주했다. 아파트를 살 만한 돈이 없었으나 나이 50이 넘어 전셋집에서 살 수 없다는 장모님의 주장에 따라 장인의 도움과 은행 빚을 얻어 집을 구입했다. 내가 대구 계명대에 있는 동안 한신대에서는 학생들의 반정부 시위가 열렬했다. 학교가 무기 휴학 조치를 받은 일도 있었고, 김정준 학장을 비롯한 교수들이 항의 표시로 삭발을 했으...
입력:2021-07-11 14:10:01
[역경의 열매] 이장식 (24) 반정부적 설교로 학생 소요 부추겼다며 교목서 해임
육영수(가운데) 여사의 계명대 방문 당시 찍은 사진. 오른쪽 위 검은 양복을 입은 사람이 이장식 교수다. 대구로 내려온 지 두 달만인 1971년 9월 29일 아침 어머니께서 76세의 나이로 그만 운명하셨다. 어머니는 세수하고 부엌에 나와 아내 옆에서 말린 생선을 손보다가 그 자리에서 쓰러지셨다. 방으로 옮기고 의사를 불러왔으나 이미 숨을 거두셨다. 어머니 본인은 편하게 눈을 감으셨지만, 자식 된 내겐 너무 충격이 컸다. 나와 아내가 미국에서 돌아와 이제 좀 편하게 모시려고 마음먹었는데, 자식의 소원도 부질없는 것이 됐다. 일찍이 남편과 장남이 세상을 ...
입력:2021-07-08 14:05:02
[역경의 열매] 이장식 (23) 아내의 헌신으로 1년 8개월 만에 박사학위 취득
이장식 교수의 아내 박동근 사모가 세 딸과 함께 미국 두뷰크 집 앞에서 찍은 사진. 두뷰크의 우리 가족은 어느 길가의 집 2층을 얻어 입주했다. 아내는 자동차 면허를 쉽게 딴 다음 500달러를 주고 중고차 한 대를 구입했다. 우린 두뷰크의 장로교회에 다녔고, 아내는 친절한 교인들을 통해 쉽게 직장을 소개받을 수 있었다. 내가 학업에 열중하는 사이 아내는 여러 일을 했다. 첫 일자리는 꽃을 심고 키운 다음 화분에 옮겨 심는 일이었다. 힘든 일은 아니었지만 임금이 적었다. 얼마간 이 일을 하다 아내는 맥도널드 공장 직공으로 채용됐다. 유학생 가족 비자라 ...
입력:2021-07-07 14:10:01
[역경의 열매] 이장식 (22) 한신대 재직 중 안식년 맞아 예일대 연구교수로 유학
이장식 교수의 딸 현이 1969년 미국에서 유학 중인 아버지께 보낸 크리스마스 카드. 이때만 해도 현은 자신이 그해 미국으로 건너가게 될 거라고 생각을 못했다. 아내는 결혼 후 5~6년간을 가사에만 매달리며 어린 아이들을 키웠다. 그러다 어느 정도 아이들이 크자 못다 한 공부를 하고 싶어 했다. 아내는 한신대 대학원에 입학해서 기독교 교육을 전공하기로 했다. 학교와 집이 한 캠퍼스에 있으니 그만큼 공부하는 데 편하긴 했지만 역시 가정을 돌봐야 했기 때문에 힘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이 무렵 나는 한신대 10년 근속 후 처음으로 안식년을 맞이했다. 1968...
입력:2021-07-06 14:05:02
[역경의 열매] 이장식 (21) 전국신학대학협의회 설립… 교파 간 교류의 물꼬 터
한신대 수유리 캠퍼스 사택 앞에서 찍은 이장식 교수 가족사진. 1964년 우리 가족은 학교 정문이 바라보이는 곳에 있는 사택 2층집으로 이사했다. 아내와의 사이에 진, 현, 영이가 태어났다. 앞서 태어났던 정이와 철이까지 하면 2남3녀 대가족이 됐다. 한신대 캠퍼스는 공부하기 좋은 곳이었고, 교수 자녀들에게는 꽃동산이었다. 초등학교에 아직 다니지 않던 교수 자녀들이 많았는데 저녁마다 TV를 보려고 우리 집 마루에 모여 앉았다. 이 TV는 손아래 동서 되는 김운용(전 국제올림픽위원회 부위원장)씨가 미국 뉴욕에 있는 유엔대사관 한국 참사로 부임해가면서 ...
입력:2021-07-05 14:05:03
[역경의 열매] 이장식 (20) 상처 후 평생의 조력자 된 지금의 아내 만나 재혼
이장식 교수와 박동근 사모의 1960년 3월 7일 결혼식 당일 사진. 채봉씨와의 사별 후 어머니와 여동생이 서울로 올라와 첫째와 미숙아로 태어난 둘째를 돌봤다. 1년이 지나자 여러 분이 재혼을 권했다. 난 서두를 필요를 느끼지 못했지만, 아이들이 어릴 때 재혼을 하는 게 좋다는 여럿의 권고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아이 둘 가진 홀아비가 재혼하긴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수원장로교회 이주원 목사님의 소개로 그 교회 중등부 교사였던 박동근씨와 만나게 됐다. 동근씨는 재원이었다. 당시 수원 농업진흥청 청소년 지도과에 재직하면서 4H운동(농업...
입력:2021-07-04 14:05:04
[역경의 열매] 이장식 (19) 전도관 신앙에 빠진 아내와 장모, 아이 아픈데 기도만
전도관 앞에 늘어선 생수통들. 전도관 신도들은 박태선씨가 축복한 이 물을 만병통치약으로 믿었다. 현대종교 제공 아내는 박태선씨의 말만 믿고 나를 속히 귀국시켜 같이 신앙촌에 들어가고자 했다. 여의도 미군 비행장에 마중 나온 아내 얼굴은 무척 수척해 있었다. 그런 그를 보자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아내를 따라 마포 한 언덕 위의 천막집으로 갔다. 그곳엔 여섯 살 정이가 독감으로 열이 심한 채 누워 있었다. 아내는 이 작은 천막 단칸방에서 모친과 여동생과 함께 살면서 ‘마포 오만 제단’이라 이름 붙인 전도관 건축 공사장에 매일 나가서 벽돌을 ...
입력:2021-07-01 14:05:03
[역경의 열매] 이장식 (18) 휴전으로 서울 복귀… 학급 담임 맡다 캐나다로 유학
캐나다 퀸즈신학대 유학 시절 동문들과 함께 찍은 사진. 뒷줄 오른쪽에서 세 번째가 이장식 교수. 한국전쟁은 휴전으로 멈추게 됐다. 1953년 8월 신학교가 부산에서 서울로 복귀했다. 나 역시 함께 올라와 개강 준비를 했다. 신학교는 그 이듬해 4월 신입생 30여명을 모집했다. 나는 그들의 학급 담임을 맡았다. 그러나 이들 신입생과 사귈 시간적 여유도 없이 난 캐나다로 유학을 떠나게 됐다. 내가 간 곳은 캐나다 옛 수도 킹스턴에 있는 퀸즈신학대였다. 이 학교 학생회가 내 학비를 부담했는데, 내가 이렇게 장학금을 받을 수 있었던 건 당시 토론토 임마누엘 신...
입력:2021-06-30 14:05:04
[역경의 열매] 이장식 (17) 전쟁의 화마 속 어려움 같이 이겨낸 아내와 결혼
1952년 부산 동구 초량동 피란민 마을 모습. 이장식 교수는 그해 부산으로 피란 와 남부민동에 터를 잡았다. 출처 부경근대사료연구소 안국동 수용소에서 풀려나왔지만, 그렇다고 안전한 건 아니었다. 한국신학대학 기숙사에 있는데 한 남자가 들이닥쳤다. 그러더니 나에게 빨리 밖으로 나가 기다리라고 했다. 인민군이었다. 나는 직감적으로 또 붙들렸구나 생각했다. 아래층으로 내려가 머뭇거리며 신발을 신는데, 근처에 있던 성바울교회(현 서울성남교회) 김응락 장로가 내게 도망치라는 사인을 줬다. 나는 신학교 마당을 가로질러 사택들이 있는 골목길을 빠져 ...
입력:2021-06-29 14:05: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