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유동부 (6) 첫 사업과 결혼, 모든 게 잘 풀리나 싶더니…

유동부 대표가 1996년 경기도 성남시의 한 우유 대리점에서 우유 배달을 할 당시 목장 견학을 갔다가 첫째 아들, 아내와 함께 사진을 찍었다.


김성로 목사님께 양육을 받으며 구원의 확신, 기도 응답의 확신을 얻었다. 당시 목사님 메시지는 어두운 세상 가운데서 빛의 세계를 경험하게 하는 놀라운 성령의 역사였다. 마치 그의 눈에선 불이 나오는 듯해 뜨거웠다. 금방이라도 세상을 빛의 세계로 바꿔 버릴듯한 그 힘은 지금 생각해도 전율이 느껴질 정도다. 목사님 스스로는 권위를 내세우지 않으셨지만, 난생 처음 접하는 불같은 성령의 능력 앞에 우리 모두 굴복됐다.

1년여 동안 목사님의 양육을 받던 나는 어머니 요청으로 다시 서울로 올라오게 됐다. 당시 어머니는 서울로 올라오셔서 식당과 공장 등 닥치는 대로 일하시며 생계를 꾸려 나가셨다. 비록 단칸방이었지만, 다시 가족이 모여서 살 수 있게 됐다. 방이 좁아 서로 몸을 포개 쪽잠을 잤던 기억이 있다.

서울로 올라온 1993년, 스물넷이 된 나는 나만의 사업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더 커졌다. 기술을 배우려고 제과점을 옮겨 다니던 나는 다리를 다쳐 장사를 접게 된 한 사장님으로부터 가게를 넘겨받게 됐다. 드디어 내 첫 사업장이 생긴 것이다.

그 무렵 지금의 아내를 만나 결혼도 했다. 일과 사랑까지 모든 게 순조로웠다. 앞으론 승승장구할 일만 남은 것 같았다.

신앙생활은 서울에 올라와서도 나름대로 열심히 했다. 서울 구로구의 한 장로교회에 출석했다. 돈 버는 족족 교회와 전도, 선교에 다 썼을 정도였다. 교회 청년부 봉사도 열심히 했다. 부인도 그때 만났다. 부인은 당시 그 교회에서 피아노 반주 봉사를 했는데 그 모습이 좋아 보여 결혼까지 이어졌다.

하지만 춘천에서의 뜨거웠던 1년간의 신앙생활만으론 버티기 힘들었나 보다. 그때 받은 신앙의 열정과 에너지를 소모하는 생활만 이어지자 결국, 내가 제일 경멸했던 위선적인 크리스천의 모습으로 변해 갔다.

사업도 기술이나 경력 등 모든 것이 부족했던 탓일까. 점점 여의치 않았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마치 소꿉장난하듯 열정만 갖고 뛰어들었으니 잘될 리가 없었다. 결국, 첫 사업은 빚만 남긴 채 실패했다.

춘천을 떠난 지 10년째인 1999년쯤에 이르러서는 더는 이렇게 타락하고 변질한 그리스도인으로 살 수 없다는 애통함이 생겨 다시 춘천한마음교회를 찾게 됐다.

10년 전 그 뜨거움을 회복하고 싶다며 찾아온 내게 김 목사님은 기꺼이 교제권을 허락해 주셨다. 당시엔 토요일마다 예배를 드리러 춘천에 내려올 때면 너무 좋았다. 비로소 안식을 얻는 것만 같았다. 서울에서 더는 신앙생활을 이어가지 못하겠단 확신이 들었다. 춘천한마음교회를 섬기자고 아내를 설득했다. 아내는 지금도 아무 문제 없이 신앙생활 열심히 잘만 하고 있는데 뭐하러 그 먼 강원도까지 교회를 다니냐며 반대했다. 반대가 너무 심해 난 결국 무릎까지 꿇고 한 번만 가보자고 부탁했다. 겨우 한 번 마음을 열고 같이 춘천으로 내려온 아내는 첫 예배를 드리고선 ‘지금까지 내가 했던 신앙생활에 큰 문제가 있었구나’를 깨닫게 됐고 그 이후론 나와 한마음이 됐다.

정리=임보혁 기자 bosse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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