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이장식 (17) 전쟁의 화마 속 어려움 같이 이겨낸 아내와 결혼

1952년 부산 동구 초량동 피란민 마을 모습. 이장식 교수는 그해 부산으로 피란 와 남부민동에 터를 잡았다. 출처 부경근대사료연구소


안국동 수용소에서 풀려나왔지만, 그렇다고 안전한 건 아니었다. 한국신학대학 기숙사에 있는데 한 남자가 들이닥쳤다. 그러더니 나에게 빨리 밖으로 나가 기다리라고 했다. 인민군이었다. 나는 직감적으로 또 붙들렸구나 생각했다. 아래층으로 내려가 머뭇거리며 신발을 신는데, 근처에 있던 성바울교회(현 서울성남교회) 김응락 장로가 내게 도망치라는 사인을 줬다.

나는 신학교 마당을 가로질러 사택들이 있는 골목길을 빠져 나와 전찻길 쪽으로 갔다. 거기서 어찌할 바를 몰라 하고 있는데 길 저편에서 한 남자가 행인 2~3명을 붙들고 조사하고 있는 게 보였다. 눈이 마주치자 그들 중 한 명이 나를 불렀다. 못 본 체하다가 마침 온 전차를 타고 장충동을 거쳐 묵정동 정류장에서 내렸다.

묵정동엔 자그마한 교회가 있었다. 신학교 제자가 만일 위급한 일이 생기면 오라고 했던 곳이었다. 난 이곳에 몸을 숨겼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신학교에서 날 놓친 사람들이 권총을 든 채 눈에 불을 켜고 날 찾아다녔다고 한다.

이 소식을 전해준 이는 정채봉씨였다. 그는 내가 삼각산에서 은신 생활을 할 때 여러모로 도움을 줬던 이였다. 우리는 본래 결혼을 약속한 사이는 아니었다. 그러나 전쟁이 우릴 더 끈끈하게 했다.

9·28 서울수복이 가까워져 올수록 서울은 아수라장이 돼 갔다. 서울역전을 비롯해 용산 일대가 불바다가 됐고, 9월 27일 아침부터는 박격포가 사방에 떨어지기 시작했다. 나와 채봉씨는 신학교 마당 언덕 위에 있는 기숙사에 몇 명의 신학생과 함께 숨었다. 그래도 불안감이 가시지 않아 언덕 아래 묻힌 토관 속으로 몸을 피했다. 이미 여러 명의 사람이 이곳에 숨어있었다.

계속된 포격에 우린 몸을 웅크렸다. 그러다 고개를 들었는데 내 옆에 앉았던 남자가 파편에 맞아 피를 흘리고 있었다. 그는 이튿날 목숨을 잃었다. 신학교 마당에 있던 신학생 일가족도 박격포에 맞아 몰사했다.

날이 새어 토관 속에서 나와 정신을 차려보니 벌써 유엔군이 탱크를 몰고 와서 큰길가에 있는 높은 건물 창 안으로 화염을 뿜어대고 있었다. 뒤로 국군 해병대가 의기양양하게 들어오고 있었다. 사방에서 “만세”라고 외치는 시민들의 환호 소리가 들려왔다. 지난 3달 동안 내가 살아남은 건 나의 명철이나 기지나 또는 요행으로 된 게 아니었다. 전능자의 구원의 은혜였다.

나는 학교로 돌아온 교수 및 학생들과 함께 부서지고 어지럽혀진 신학교 시설들을 손봤다. 또한 채봉씨와 함께 김재준 목사님을 찾아가 그간의 안부를 여쭙고 우리 두 사람의 결혼 소식을 알렸다. 그리고 얼마 후 우린 채봉씨 고향인 남해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채봉씨와 결혼하고 나는 거제도로 갔다. 그곳에서 신애균 여사가 세운 일맥원에 가서 성경과 영어를 가르쳤다. 일맥원은 1·4후퇴 때 함경도 지방에서 피난 온 여학생들을 수용하기 위해 만든 곳이었다. 그러다가 1952년 3월 부산 남부민동에 자리를 잡았다. 당시 한국신학대학이 인민군을 피해 부산에 내려와 개강했는데, 난 이곳의 부름을 받고 복직했다.

정리=황인호 기자 inhovator@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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