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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은 동역자’ 사모의 세계













‘목회는 사모의 역할이 반’이라는 말이 있다. 사모의 역할이 남편 목회와 교회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 하나님과 성도들 앞에 늘 자신을 바로 세우기 위해 몸부림치며 살아가는 사모의 삶은 눈물겹다.

목회자들은 부르심의 소명을 따라 목회를 하지만 사모는 목사인 남편을 만나 목회 현장에 뛰어드는 경우가 많다. 대부분의 사모는 남편 목회를 돕기 위해 자신의 꿈까지 내려놓은 채 교회와 성도를 섬긴다.

그들의 꿈도 처음부터 사모는 아니었을 것이다. 사모에게도 소싯적 꿈이 있지 않았을까. 교회에서 사모는 자신의 모습을 감추고 늘 뒤에서 섬기기에 그들의 이야기는 더 베일에 싸여 있다. 지금까지 잘 알려지지 않은 사모들의 꿈과 삶의 이야기를 통해 교회에서 그림자처럼 멀어져 있는 그들을 한 몸 된 지체로 품어내 보았으면 한다.

이영훈 여의도순복음교회 담임목사 뒤에는 백인자(사진) 사모의 내조와 헌신이 있었다. 백 사모는 경기여고와 서울대 수학과를 졸업했다. 1980년 결혼한 두 사람은 2년 후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백 사모는 미국 메릴랜드대학에서 응용수학 박사과정을 공부하며 조교로 일했다. 빠듯한 유학 생활 중에도 생활비를 책임지며 “아무 걱정 말고 목회에 전념하라”며 남편에게 힘을 실어줬다.

1985년 미국 워싱톤순복음제일교회 제3대 담임목사로 부임한 이 목사는 건축을 위해 교회가 완공될 때까지 5년간 사례비를 받지 않았다. 이때도 백 사모는 학업과 남편의 사역을 내조하며 70명이었던 교회를 8년 만에 1000명이 넘는 교회로 성장시켰다.

이 목사는 1992년 조용기 여의도순복음교회 목사의 부름을 받았다. 국내로 돌아가야 했지만 아내에게 미국 생활을 정리하자는 얘기를 꺼내기란 쉽지 않았다. 아내는 대학으로부터 연구원 보직을 받아 고액의 연봉을 받으며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남편의 결심을 들은 백 사모는 “주님 앞에 가진 것을 모두 내려놓겠다”며 순종했다. 쉬운 결정은 아니었다. 대학교수가 되고 싶었고 곧 될 예정이었지만 남편을 위해 믿음으로 내려놨다.

이 목사는 “차라리 투정 부리고 화라도 냈으면 덜 미안했을 텐데 미련 없이 불평 없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 아내를 생각하면 한없이 미안하고 고마울 뿐”이라고 말했다. 백 사모는 귀국 후 남편을 내조하며 한세대 컴퓨터공학과 교수를 역임했다. 현재는 한세대 혁신성장본부장을 맡아 다음세대를 말씀과 사랑으로 길러내고 있다.

평생 꿈꿔온 외교관의 꿈을 내려둔 사모도 있다. 윤난영(사진) 사모의 꿈은 외교관이었다. 세계를 돌아다니며 일하는 직업이 멋져 보였기 때문이다. 외교관의 꿈을 이루기 위해 이화여대 영문학과에 입학한 그는 대학교 1학년 때 한국기독학생회(IVF)를 통해 하나님을 영접했다. 신앙생활을 시작하게 된 내수동교회 대학부에서 소그룹 엘더였던 오정현 목사(사랑의교회)를 만났다.

얼마 후 윤 사모는 가족들과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 3년간 편지를 주고받으며 교제를 이어가던 두 사람은 1982년 결혼식을 올렸다. 사모가 된 뒤 윤 사모는 미국 바이올라대학교(B.A.)와 탈봇신학대학원(M.A.)을 졸업하고 백석대학교(Ph.D.)에서 기독교교육학을 전공했다. 윤 사모는 한 목회자 세미나에서 “젊은 나이에 목회자의 아내가 돼 사모가 어떻게 하는 것인지 몰라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사모의 길을 시작했다”면서 “40대 초반까지 광야 학교에서 남편과 자녀, 내 자아를 주님 앞에 내려놓는 연단과 훈련을 받았다”고 고백했다.

박수영(사진) 사모는 퇴짜를 놓기 위해 나간 소개팅에서 이찬수 목사(분당우리교회)를 만났다. 결혼할 생각도 사모가 될 마음도 전혀 없었기에 몇 번을 거절하다 못해 나간 자리였다. 더군다나 이화여대에서 미술을 전공한 박 사모는 대학원 진학과 유학도 꿈꿨다. 그런 그에게 이 목사는 이렇게 말했다.

“전공을 살리지 못할까 봐 걱정하는 거라면 걱정 마라. 나는 목사가 되기 위해서 한국에 왔지만 당신이 진짜 하나님이 내게 주신 배우자이고 그 배우자가 미술에 대한 마음과 꿈을 가지고 있다면 내가 목사 안 하겠다. 사람이 무엇을 하고 사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지 않은가. 게다가 나는 미국 시민권자이다. 당신이 원한다면 유학 보내줄 수 있다.”

이 목사는 자신의 저서 ‘붙들어주심’(규장)에서 “노총각이 어떻게든 장가가보려고 감언이설로 꼬드긴 것이 아니다. 당시 진짜 나의 신앙고백이었다”면서 “하나님이 여자에게 은사와 재능을 주셨다면 왜 남편 때문에 그 꿈을 접어야 하는가. 오히려 내 꿈을 접을 수도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에서였다”고 술회했다.

만난 지 두 달여 만에 결혼한 박 사모는 오랜 시간 고민하며 기도한 끝에 그는 “미술학도로서의 꿈을 기쁘게 포기하고 이 목사의 아내로서 새로운 꿈을 꾸겠다”고 결심했다. 이 목사는 “아내는 20년이 넘도록 지금까지 한 번도 미술에 대한 미련을 꺼내 보인 적이 없다. 나같이 부족한 사람에게 시집와서 자신의 꿈을 포기하고 목사 아내로서 뒷바라지하며 아이 셋을 낳아 잘 기르는 일에 자신을 희생하며 사명으로 감당했다”며 고마움을 표했다.

유난히 똑똑하고 꿈 많은 소녀가 있었다. 그는 가난한 목사, 어려운 교회를 도와주는 어머니를 보면서 “절대 엄마처럼 살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두 모녀의 심리전과 갈등은 결혼 적령기가 될 때까지 유지됐다. 배정숙(사진) 사모는 엄마가 소개해 준, 키도 작고 못생기고 가진 것 하나 없는 소강석 목사(새에덴교회)를 피해 다녔다. 적십자 종합병원에서 간호사로 근무하는 그녀를 소 목사는 하염없이 기다렸다. 어항 옆에 앉아 물고기만 바라보다 오기 일쑤였고 편지를 줘도 그녀는 뜯어보지도 않고 봉투째 찢어버렸다. 소 목사의 끈질긴 구애를 피하기 위해 배 사모는 해외 근무 수속을 밟기 시작했다. 이야기를 전해 들은 소 목사는 양복에 구두까지 신고 잘 차려입은 모습으로 배 사모 앞에 나타났다. 얼굴이 홍당무가 된 배 사모의 손을 잡고 데려간 곳은 내장산이었다. 그곳에서 그는 배 사모의 머리에 손을 얹고 “가난하고 가진 것 없지만 오직 하나님만을 사랑하는 목사 후보생 사모가 되고 싶은 마음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했다. 이후 간호사 직업을 내려놓은 배 사모는 남편의 사역을 도와 교회를 세워나갔다. 소 목사는 저서 ‘꽃씨 심는 남자’(샘터)에서 “사모로 외로운 세월을 살아온 아내를 생각하면 미안한 마음 그지없다”고 고백했다. 배 사모는 교회 내 장학구제위원회에서 섬기며 어려운 성도들을 돕는 사역에 앞장서고 있다.

정송이(사진) 사모는 조선대 간호학과를 졸업한 뒤 교련 교사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집에서 가까운 교회에 출석했다. 이때 만난 교회 청년부 전도사가 지금의 남편 김은호 목사(오륜교회)였다. 결혼 후 2년 만에 개척교회 사모가 된 정 사모는 재정적인 어려움 앞에 맞닥뜨렸다. 학교 출근을 해야 하는데 차비가 없어서 발을 동동 구른 날도 있었고, 아이의 분유를 못 사는 날도 많았다. 그는 매주 토요일 퇴근길에 학교 동료에게 5000원을 빌렸다. 이 돈으로 시장에 들러 호박 멸치 국수를 샀다. 주일에 교인들에게 직접 국수를 대접하기 위함이었다. 헌금 받은 돈으로 다시 월요일에 동료에게 돈을 갚는 일의 반복이었다.

사모가 직장 생활을 하는 동안 김 목사는 사례비도 받지 않았다. 4년 뒤 정 사모는 교편을 내려뒀다. 당시에는 사모가 직장을 가지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시대였기에 자신의 꿈을 내려놓고 교회와 성도들을 위해 기도생활을 이어갔다. 최근 서울 송파구의 오륜교회에서 만난 정 사모는 “아쉬움은 없었다. 사모로서 목회자인 남편을 내조해야 한다는 생각에 기쁨으로 내려놓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20여 년간 ‘사모 리조이스’ ‘4U’ ‘오륜사모회’ 사역으로 한국교회 사모들을 위한 섬김을 이어가고 있다. 정 사모는 젊은 후배 사모들을 향한 당부도 있지 않았다.

“사모 역할은 교회 안에만 머무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발길이 닿는 모든 곳이 교회이고 사역의 현장입니다. 하나님이 사모들에게 주신 달란트를 세상 속에서 귀하게 쓰임 받길 원합니다. 믿음의 진보도 게을리하지 마십시오. 사모는 더 많이 기도하고 늘 깨어있어야 합니다. 사모들의 행복은 관계 속에서 옵니다. 하나님과 나, 남편과의 관계가 가장 중요합니다. 사모가 행복하면 남편이, 교회가, 성도들이 행복합니다.”

박효진 기자 imher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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