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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현주의 밥상+머리] 새해에 마주할 어떤 친구들에 대하여



‘우리들은 모두 욕심이 없어 희여졌다/ 착하디착해서 세은 가시 하나 손아귀 하나 없다/ 너무나 정갈해서 이렇게 파리했다.’ 백석의 시 일부다. 여기에서 돌발퀴즈 하나. ‘우리들’은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 힌트 하나. 시인을 포함해 우리들은 셋이다. 모두 희고, 착하고, 세지(억세지) 않고, 파리할 만큼 정갈한 이 셋은 지금 낡은 나조반(음식 소반)에 나와 앉아서 쓸쓸한 저녁을 맞고 있다. ‘서로 미덥고 정답고 그리고 서로 좋은’ 우리들 셋은 친구다.

정답은, 흰밥과 가자미와 나. 옛 시인 윤선도는 수(水) 석(石) 송(松) 죽(竹) 월(月)을 두고 오우가(五友歌)를 불렀고 바늘, 실, 골무, 가위, 자, 인두, 다리미를 규중칠우(閨中七友)라 칭하며 쟁론기를 남긴 작가도 있지만은 밥상 위의 흰밥과 가자미를 친구라 부르는 시인이라니. 이 시의 제목은 ‘선우사(膳友辭)’다. 말 그대로 음식 친구. 음식을 친구 삼아 음식이 내 밥상까지 온 내력을 생각해보는 사람. 음식이 음식 이전에 한 생명이었음을 떠올리는 사람. 그런 사람은 얼마나 외롭고 높고 쓸쓸한 걸까?

겨울 음식처럼 백석의 시는 겨울에 더 당긴다. 언젠가 평안북도에서 새해를 맞게 된다면 그가 말한 무이징게국을 맛볼 수 있을까? 지금은 무이징게국을 대신해 무와 새우젓을 넣은 굴국도 좋을 성싶다. 레시피는 간단하다. 굴은 소금을 뿌려 살살 주물러 씻는다. 무는 굵게 채 썰고, 미역도 조금 불려둔다. 파와 부추, 청양고추와 홍고추도 미리 썰어둔다. 냄비에 다시마 육수를 내고 채 썬 무와 미역을 넣어 끓인다. 무가 익으면 새우젓과 소금으로 간을 하고, 다진 마늘도 조금. 굴은 마지막에 넣어 떠오르는 거품을 걷어내고 파와 고추, 부추를 올리면 끝이다.

자, 이제 밥상 위 흰밥과 굴국을 마주했으니 나도 음식 친구들의 내력을 생각해보려 하는데, 그만 양식 굴이라는 사실에 부딪치고 만다. 대신 올여름이면 세계 최초로 문어 양식이 시작된다는 소식에 환경론자들이 반대하고 있다는 뉴스가 떠올랐다. 넷플릭스에서 다큐멘터리 ‘나의 문어 선생님’을 본 사람들이라면 문어 식용 자체가 고민스러울 것이 틀림없다. 사람을 알아볼 만큼 ‘지각 있는’ 생명을 아예 먹지 말자고 할 수는 없지만, 음식 이전의 존재로서 그들의 생태와 생명에 대해 생각해보는 일이야말로 지각 있는 인간들의 몫일 것이다.

시인은 먹지 않기 위해 선우사를 쓴 것이 아니다. 오히려 먹기 위해 쓴 것이다. 무언가를 먹기 위해서는 서로 미덥고 정답고 좋은 관계가 돼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내 밖의 생명이 내 생명을 채워주는 데 대한 최소한의 예의와 감사이기도 하다. 우리가 밥상을 마주하는 일은 상품을 마주하는 일과는 아주 다른 일이라는 걸 생각하며, 다시 선우사를 읽는다. ‘흰밥과 가자미와 나는/ 우리들이 함께 있으면/ 세상 같은 건 밖에 나도 좋을 것 같다.’ 새해에는 흰밥과 굴국과 당신도 밥상 앞에서 세상 같은 건 밖에 나도 좋을 것 같기를.

최현주 카피라이터·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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