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이건숙 (22) 낮엔 육아와 교회 일, 밤엔 양로원서 간호 보조로

소설가 이건숙(왼쪽) 사모가 1981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상식에서 단편 ‘양로원’으로 소설부문 상을 수상하고 있다.


둘째 아들을 낳고는 워킹 블라인드에서 시각 장애인들과 일할 수가 없어 나는 남편 신성종 목사와 의논해 한국에 두고 온 큰아들을 데려오기로 했다. 연년생의 두 아들을 낮에는 내가 교회 일을 하면서 돌보고, 학교에서 돌아온 남편이 밤에 교회 일을 하면서 아이들을 돌보는 시간에는 내가 또 밤에만 일하는 직업을 구하기로 했다. 그 방법이 아니면 우리는 귀국할 수밖에 없었다.

신문 구인광고를 보니 밤에만 일할 수 있는 곳은 양로원뿐이었다. 30대 초반이니 건강이 버텨줄 것이라고 기도하면서 들어갔다. 밤잠을 자지 않으면서 일한 것이 결국 나중에 건강에 큰 문제로 남긴 했지만, 당시엔 그 길만이 우리 부부의 살길이었다. 아이 기저귀를 손으로 빨아가면서 돈을 아껴 남편의 학비를 마련하느라고 애가 탔다.

미국 대학 등록금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비쌌다. 책 욕심이 많은 남편은 어느 때는 대책 없이 책을 사들였다. ‘Great Books of the Western World’는 당시 54권 장서로 호메로스부터 지그문트 프로이트까지 저작을 다뤘으며 도서관에선 참고도서실에 배치하는 귀한 책이었다. 나는 열심히 양로원 일을 하면서 통장에 1000달러를 학비에 쓰려고 푼푼이 모았는데 남편은 그걸 몽땅 지불하고 그 책을 사들였다. 그 황당함은 정말 참을 수 없을 지경이라 무조건 길을 따라 한 시간을 걷다가 마음을 진정하고 다시 되돌아오면서 나는 하나님을 향해 마구 항의 기도를 했다. 나를 왜 신학생과 결혼시켜 이런 지경까지 몰아넣어 고생을 시키느냐고 울부짖는 중 하나님은 내 일생 처음으로 음성으로 다가왔다. 이렇게 다정한 음성으로 응답을 듣기는 일생 처음이었다.

“딸아! 내가 너를 축복하여 노년에는 냉장고가 넘치도록 먹을 것을 줄 것이며 물질로 인해 고생시키지 않을 터이니 인내해라. 네 남편은 내가 크게 들어 쓸 것이다.”

하나님은 단점도 많은 남편을 무조건 사랑하고 지명하여 불러서 앞으로 쓸 계획으로 이 가정을 이끌어가고 있음을 확신했다.

양로병원에서도 자격증 가진 간호사는 머리에 검은 줄 두 개를 두른 모자를 썼는데 아주 권위가 당당했다. 나는 간호보조원으로 밤에만 일하니 주로 기저귀를 갈아주며 치매 노인들을 돌보는 일을 했다. 얼마나 기저귀를 많이 갈아주었으면 침대의 가드 라인에 닿은 내 흰 가운의 가슴팍이 한 줄로 닳아서 나긋나긋해질 정도였다. 특히 죽어가는 노인들 옆을 지키는 건 인생을 깊게 보는 심안을 길러주었다. 밤 11시에서 아침 7시까지 근무하니 남편이 아침에 나를 픽업하면 집에 와 샤워를 하면서 많이 울었다. 내겐 너무 힘든 현장이었기 때문이다. 내 울음소리로 남편이 공부를 중단할 것이 두려워 나는 물을 더 세차게 틀고 소리가 밖에 새지 않도록 했다.

한 사람의 목회자요 신학자를 길러내는 길이 이렇게 힘들고 희생이 따르는 고난의 길인 걸 어찌 사람들이 알겠는가. 그러나 이 고행의 길이 나를 소설가로 만들었다. 귀국 후 양로원에서 일한 체험이 속에서 곰삭아 터져 나와 쓴 단편 ‘양로원’이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었으니 말이다.

정리=우성규 기자 mainport@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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