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이건숙 (23) 가발 사업 시작한 지인 “돈 많이 줄 테니 도와줘”

소설가 이건숙 사모가 미국 유학 중이던 1973년 필라델피아의 가발가게에서 선반을 배경으로 웃고 있다.


아이 둘을 거느린 가난한 유학생 부부는 그야말로 사면이 꽉 막힌 상태였다. 그냥 귀국하느냐 아니면 하나님의 도움을 간구하여 열린 문을 찾아야 하느냐 하는 갈림길에 서게 됐다. 그 시기에 뜬금없이 워킹 블라인드에서 함께 일하며 내가 전도해 예수를 믿게 된 P여사가 전화했다.

“밤에 양로원에서 일하니 건강도 버리고, 돈도 밑바닥 수당을 받으니 어떻게 살아. 내가 은혜를 입었으니 갚아야지. 가발 가게를 열었는데 손이 모자라니 가장 바쁜 주말에만 나와서 도와줘. 양로원에서 받는 돈 3배를 줄 터이니 요번 금요일부터 와라.”

우선 밤에 잠을 잘 수 있었고 금요일과 토요일이면 남편 신성종 목사의 수업이 없으니 아이들을 맡기고 갈 수가 있었다.

선반에 셀 수 없이 놓인 가발들은 한국에서 수입해오는 것으로 우리나라에서도 판로를 찾고 있던 시절이었다. 인공 머리는 진짜 머리보다 스타일을 내기도 쉬웠고 그냥 비닐 백에서 꺼내 탁탁 털어서 머리에 써도 자연스러운 웨이브가 환상적이었다. 인간의 머리보다 인공적으로 만든 머리털이 더 반짝이고 윤기가 흘렀으며 값도 쌌다.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머리는 고불고불해서 포크로 북북 잡아 뜯어야 빗겨질 정도로 거칠었다. 그들은 금요일 오후 주급을 받는 순간 가발가게로 달려왔다. 먹을 것이 떨어져도 우선 가발을 사고 나머지 돈으로 슈퍼마켓에 갈 정도로 완전히 인공가발에 미쳐있었다. 선반에 툭툭 털어서 걸어놓을 시간이 없을 정도로 주말은 바빴다. 돈이 홍수처럼 밀려들어 오니 P여사는 그 돈 관리며 세금 계산이 만만치 않아 이 분야를 내가 움직여야 했다. 미국은 세금을 속이면 살인자보다 더한 형량을 받을 수 있으니 속이지 말고 꼬박꼬박 보고해야만 했다.

한국인으로선 드물게 미국에서 비즈니스를 개척해 사업을 시작한 그녀에게 내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세무사를 만나 세금 보고하는 형식도 알아오고 사업을 할 수 있는 기반을 닦아주어야 했다. 아프리카계 도우미를 써서 일손도 줄이고 같은 인종끼리 거래하니 손님은 구름처럼 꼬였다.

“이제 이 정도면 나 혼자 가발가게를 운영할 수 있겠어. 내가 미시즈 신을 공부하도록 길을 열어주고 싶다는 마음을 억누르지 못하겠어. 똑똑한 사람이 막노동만 하면 우리나라의 손해지.”

“남편의 종합대학 등록금도 숨이 찬데 어떻게 나까지 공부를 할 수 있겠어.”

“남쪽 필라델피아에 내 이름으로 가발 구멍가게를 내줄 터이니 거기 이득금은 전부 미시즈 신이 가지도록 해. 그 가게를 열어주는 건 미시즈 신이 석사 학위라도 받을 공부를 한다는 조건이야.”

그 친구의 이름으로 가게를 열기로 하고 남쪽 필라델피아 리하이 거리를 우리 부부는 들쑤시고 다녔다. 굉장히 위험한 곳이었다. 조그마한 가게를 연 사람도 허리에 권총을 차고 있을 정도로 권총 강도가 많은 슬럼가였다. 차를 타고 가면서 쏴대는 통에 무고한 희생자가 많이 나온 지역이었다. 절대 가지 말아야 할 정도로 위험한 곳이었으나 가발은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주 고객이니 거기로 파고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사방이 꽉 막힌 상태에서 하나님이 열어준 틈새였다.

정리=우성규 기자 mainport@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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