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이건숙 (24) 가게 데리고 나간 아이들 거리에서 “Come in, Try the wig”

소설가 이건숙 사모가 1988년 남편 신성종 목사, 두 아들과 가족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우리 부부는 겁도 없이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에게 물어물어 선반을 샀다. 하나씩 둘러메고 와서 사방에 선반을 매달고는 가발을 진열했다. 필라델피아 남쪽에 처음 들어선 가발 가게였다. 금요일 오후와 토요일에 손님이 밀려와서 선반에 진열해놓은 가발이 하나도 남지를 않았다. 몽땅 팔려 돈이 소쿠리에 수북했다. 주말에 팔리는 것이 그 주간의 80%를 차지했다.

주중에는 아이 둘을 데리고 기차와 버스를 번갈아 갈아타고 가발가게에 와서 장사했다. 손님이 적어 아이들을 돌볼 수 있었고 한국 수출업자들이 직접 가발을 가져와서 그 주간에 팔릴 양만큼 주문도 해야 했다. 아이들은 좁은 가발가게에 갇혀 지내기 답답해서 내가 다용도실에서 고객들이 맡긴 가발을 세탁하는 잠깐 사이 길거리로 나갔다. 놀라서 쫓아나가니 두 아이는 지나가는 흑인 여자들을 향해 이렇게 외치고 있었다.

“Come in, come in. Try the wig. You look so gorgeous.”(어서 들어오세요. 가발을 써보세요. 당신 정말 예뻐요.)

나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여기서 아이들 교육을 한다는 건 차라리 유학 생활을 접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이 퍼뜩 스쳤다.

수입이 많으니 교회 사찰 직은 남편 신성종 목사의 친구 유학생에게 넘기고 아파트를 얻어 나갔다. 그리고 그 시절 그리 흔하지 않은 일이지만 아이들을 낮에 맡아 돌봐줄 베이비시터를 구했다. 남편의 직장을 따라 플로리다에서 이사 온 백인 여자는 흔쾌히 우리 아이들과 자신의 아이들 모두 함께 돌보기 시작했다. 그래도 걱정이 되어 하루는 살짝 숨어서 그 집을 찾아 나섰다. 넓은 마당에 아이들 다섯이 뛰어놀고 있었다. 백인 여자는 기다란 막대기를 들고 계단 위에 서서 아이들이 위험하게 움직이거나 싸우든지 울타리 밖으로 나가면 막대기를 휘두르면서 사령관처럼 호령했다. 베이비시터와 눈을 맞추면서 점심을 먹는 현장에 몰래 숨어 들어가 우리 아이들을 살폈다. 세상에! 이건 완전 군대 교육이었다. 밥을 먹은 접시엔 절대로 음식이 남아서는 안 되는 모양이다. 우리 아이들은 콩을 싫어하는데 절반은 콩이라 걱정을 했지만 다른 아이들과 함께 음식을 싹싹 먹어치우고는 나란히 서서 접시를 싱크대에 올려놓았다. 마음이 놓이기는 했지만 가슴이 찡하니 아팠다.

야간대학원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미국 도서관은 자유 개가식 시스템이라 호기심을 자극했다. 게다가 도서관학과는 석사 코스로 자신의 전공 분야의 책들을 분류하는 작업을 해도 된단다. 내 경우는 독문학과 한국 도서를 분류하면 방에 갇혀 책만 분류하고 돈도 벌 수 있다니 마음에 쏙 들었다. 필라델피아에서 가톨릭 계통의 사립대학으로 흑인 학생이 없는 부자들만 다닌다는 빌라노바대학의 입학 허가를 받았다. 입학시험을 통과하고 야간에 가발가게를 닫고 일주일에 두 번 수업에 들어가야 했다. 남편의 지청구는 대단했다. 어린아이 둘을 두고 공부한다는 것이 억지라고 어찌나 잔소리를 하고 투덜대는지 주눅이 들었지만, 친구가 제시한 조건을 어길 수 없었다.

정리=우성규 기자 mainport@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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