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이건숙 (29) 기독 작가의 글은 생명의 양식… 성도들 삶 문학으로 승화

소설가 이건숙(앞줄 왼쪽) 사모가 1998년 남편 신성종 목사, 두 아들, 며느리 및 손주와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다. 한 국가처럼 세상 모든 층의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다. 영아 거지 사기꾼 부자 낙오자 정치가 교수 의사 등 모든 층의 사람들이 모인 나라이다.

낙심하고 가난한 병든 사람들을 사랑으로 돌봐야 하고, 거드름을 피우는 가진 자들을 이끌고 천국을 향해 대행진을 하는 곳이다. 사모의 자리는 그 나라의 퍼스트레이디이지만, 존경을 받고 위함을 받는 자리가 아니다. 오히려 맨 밑바닥의 사람들을 섬기며 맨 위의 귀족들까지 다 돌봐야 하는 자리다.

이런 사모의 자리는 정말 많은 글감을 얻을 수 있는 위치다. 내게 문학을 배우는 사모들은 늘 너무 바빠서 글을 쓸 수 없다고 고민을 털어놓는다. 맞는 말이기도 하고 틀린 말이기도 하다. 글감의 바다에 던져져서 저들을 돌보며 문학으로 승화할 수 있도록 도우라는 것이 내 소명이었다. 나는 사모들에게 하나님의 문화 속에서 예술 작품으로 삶을 써보라고 권한다.

유튜브에 낭송한 내 단편소설 중에 ‘황홀한 나들이’란 작품을 많은 이들이 듣는다. 이 작품은 목회 현장에 흔한 성도들을 모델로 쓴 작품이다. 돈으로 목이 굳은 사장 부인, 교수 부인, 시어머니와 남편을 미워하는 등의 삶을 문학으로 승화한 작품이다. 문학이란 다수에게 공감을 주는 포장된 예술품이라 저들은 자신의 이야기인 줄 모른다. 그들 이야기를 썼다가 목회에서 쫓겨난다고 걱정을 하는 사모들을 만나면 효과적인 문학적 장치를 하라고 말해준다. 상징, 은유, 환유, 비유, 상상, 함축된 표현 등의 장치와 기교를 동원하라고 말이다. 문학은 바로 그런 예술성을 살리기 위해 긴 시간 전문성을 요하는 훈련과 노력이 필요하다. 우리 기독교에 산문 작가가 귀한 것은 이런 긴 시간의 훈련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크리스천 작가인 내가 쓰는 글은 생명의 양식이 돼야 한다. 총 칼 독과 같이 사람의 영혼을 유린하는 흉악한 수단이 돼서는 안 된다. 원수도 감동하도록 써야 한다. 잘 쓴 작품은 독자가 아프도록 생각하게 하는 무엇을 내포하고 있는 법이다. 화롯가의 이야기처럼 흥미만 자극하는 것이 아니고 독자가 묵상할 수 있을 만한 적절한 소통 지연의 장치가 필요하다.

내가 소설가로 등단하자 오랜 기간 소설을 써서 알려진 분이 진지하게 이런 충고를 해주었다.

“단편을 몇 편 썼다고 소설가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적어도 50편의 단편을 쓰고 나서 소설가란 명패를 달아야지요.”

맞는 말이다. 작가로 등단해 꾸준히 10년을 써야 신인이란 타이틀을 벗을 수 있는 자리가 바로 글 쓰는 사람들의 위치이다. 그만큼 오랜 인고와 수련 시간이 필요한 법이다. 자신이 겪은 체험이 작가들의 큰 밑천이지만 책을 통해 만나는 간접 체험도 중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역사 심리학 철학 자연과학 생태학 신화 외에도 많은 문학 작품을 꾸준히 읽어야 한다.

문학이 죽은 시대라고 하는데 나는 아니라고 본다. 문학은 인류의 양심이요 가치관이기 때문이다. 새 바벨탑을 쌓고 있는 인공지능 메타버스를 거치면 시대의 마지막 주자로 영성을, 문학과 기독교를 다시 찾게 될 것으로 확신한다.

정리=우성규 기자 mainport@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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