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황성주 (4) 세계복음화 비전 영향받고 ‘평생 복음 전하는 의사 되게…’

대학생 시절 황성주 회장(오른쪽 첫번째)과 한국대학생선교회 형제들이 영적 스승인 김준곤 목사(맨 왼쪽)로부터 말씀을 듣고 민족복음화의 사명을 가슴에 아로새겼다.


김준곤 목사님과의 만남은 선물 그 자체였다. 특히 지상명령이라고 불리는 ‘너희는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 28:19~20)는 말씀에 근거한 세계복음화의 비전은 피 속을 흐르듯 내 일생일대의 신앙 철학이 됐다.

그래서 대학시절 미친 듯이 복음을 전했고, 주님 닮기를 열망하며 최고의 비전인 세계선교에 목숨 거는 삶의 기초를 세웠다. 지금도 김 목사님의 얼굴만 떠올리면 힘이 저절로 난다.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기쁨과 슬픔이 반쯤 섞어있는 우수에 찬 얼굴이 사진처럼 떠오른다. 목사님은 웃다가도 울고 울다가도 웃으셨다. 끝없이 기도하고 금식하며 난제들을 돌파해 가셨다. 목사님은 누가 봐도 성경에서 달려 나온 말씀의 사람이었고 항상 내면의 불꽃이 타오르는 성령의 사람이었다. 그 분은 주님이 없는 조국, 분단된 겨레의 현실을 품고 울고, 뜨거운 믿음의 젊은이들을 바라보며 웃었던 것 같다.

물론 그분에게도 개인적 고통과 상처는 엄청나게 크고 깊었던 것 같다. 그래서 인간적 한계와 연약함이 있었지만 대부분 고통스런 성장과정 및 시대상황과 연관된 불가항력적인 것이었다고 해석한다. 목사님이 소천하기 2년 전 어느 날이었다. 서울 종로구 평창동 찻집에서다. 상상을 초월한 성경적 비전과 일상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말씀에 필자는 온몸에 전율을 느끼는 은혜를 받았다.

그 은혜로 사자처럼 포효하고 ‘캠퍼스 복음화’ ‘민족 복음화’ ‘세계 복음화’의 비전을 선포하며 달려갔다. 200만 성도가 모인 1980년 세계복음화 여의도 집회에서 10만 선교사 헌신을 끌어낸 그 엄청난 도전적 삶은 내 생애를 뒤흔드는 계기가 됐다. 그 영향력으로 의과 대학시절 내내 나의 기도는 ‘평생 복음을 전하는 의사가 되게 해 달라’는 오직 한 가지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졸업 후 의대교수가 돼 캠퍼스 복음 사역이 계속됐다. 그리고 이후 하나님의 강권적인 은혜로 복음의 영역이 확대되면서 한 번도 생각지 못한 인생의 궤도를 달리게 됐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말씀도 생각이 나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거지순례 전도였다. 77년 남해안을 돌았던 19인조 형제들의 7박 8일 일정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나는 거지 대장으로 ‘돈 주고 음식을 사 먹지 않는다.’ ‘만나는 마을마다 가정마다 빠짐없이 전도한다.’ ‘돈 주고 차를 타는 일 없이 마지막까지 걸어서 간다.’ ‘두 사람이 한 조가 되어 전도도 하고 밥도 같이 얻어먹는다’ ‘대장의 명령에 절대 복종한다’ 등의 원칙을 정했다. 경남 진주에서 하동으로, 하동에서 전남 광양으로, 광양에서 순천으로, 경상도와 전라도를 누비며 전도의 기쁨과 청춘의 아름다움을 만끽하던 순간들이었다. 그런데 이 체험이 나중에 무의촌 진료와 의료 선교, 세계 100여 개국을 누볐던 총체적 선교, 세계를 섬기는 사랑의봉사단과 기도특전단으로 연결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른바 ‘나그네 기질’의 발현이었다.

정리=윤중식 종교기획위원 yunj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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