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황성주 (5) 3년 내 서울대 복음화 확신… 학우들 전도에 승부 걸어

40년 전 서울대 캠퍼스 복음화의 주역들. 왼쪽부터 이원재 조선대 교수, 홍종인 서울대 교수, 황성주 회장, 소영섭 전 연변과기대 교수.


1976년 10월 15일 서울대 개교 30주년 기념일이었다. 학생회관 뒤쪽 26동 대형 강의실은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 ‘정신사의 강은 어디로 흐르는가?’라는 제목으로 김준곤 목사님의 신앙 강좌가 있었기 때문이다.

강연이 끝나고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졌다. 서울대 한국대학생선교회(CCC) 총무 순장을 맡았던 나는 강단으로 뛰어올라가 ‘서울대 복음화 선언문’을 낭독했다. 그것은 당시 대표 순장이던 박하정 형제와 의논해 만든 것이었는데 초안을 작성한 내가 낭독했다. 그 내용은 ‘오늘의 서울대 복음화는 내일의 민족 복음화’라는 기치 아래 ‘앞으로 3년 내에 서울대를 복음화하겠다’는 것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무모했던 일이지만 그 당시에는 그 목표가 달성될 것을 추호도 의심치 않았다. 기도하고 금식하며 밀어붙이면 안 될 것이 없다고 확신에 차 있었다. 서울대 복음화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임에 틀림없고 하나님의 뜻이기에 ‘무엇이든지’라는 말씀에 근거하여 서울대 복음화의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더욱 든든했던 것은 지금까지 박 형제와 내가 기숙사에서 이뤘던 복음의 놀라운 역사, 그 경험으로 인한 자신감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친구들을 전도하고 다음에는 후배들을 전도했다. 전도는 못해도 일단 채플에 데려가거나 2박 3일의 LTC세미나에 참석하게 되면 변화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일단 예수님을 영접한 학생들은 순모임에 연결돼 양육을 계속했다. 대개의 학생들이 주일에 공허해 하면서도 교회에는 귀찮아 안 나가는 경우가 많았다. 여기에 착안해서 시작한 아이디어가 ‘공수 작전’이었다. 나중에는 주일에 버스를 대절해서 기숙사 앞에 대기시켜 놓고 사내 방송을 통해 ‘신앙생활을 권면하는 식’으로 해서 학생들을 실어 날랐다. 한때는 참석자가 너무 많아 버스를 두 대 불러야 하는 어려움도 있었다. 그만큼 서울대 기숙사는 복음의 황금어장이었다. 당시 서울대 복음화의 정의는 ‘모든 학생들에게 1대 1로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는데 ‘여호와 이레’로 그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이 신비스럽고 놀라울 뿐 아니라 그 과정에서 받은 은혜는 이루 말할 수 없다. 회고하건대 정말 감사한 것은 내 젊음의 한 복판을 주님께 헌신하며 후회 없이 캠퍼스 복음화에 전 삶을 내던진 일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이것은 새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이 예비하신 예행연습이고 전주곡에 불과했다. 이 때부터 승부사 기질이 발휘되기 시작했다. 의대교수 시절 교회 개척(1987)과 국제사랑의봉사단 설립(1992), 사랑의병원 설립(1994), 경제공동체 이롬 설립(1997), 꿈의 학교 설립(2002), 세계선교지도자회의(2002), 백만자비량 선교운동(2006), 평양대부흥 100주년 연합집회·Transform USA 운동(2007), 킹덤드림 선포(2010), 우간다 쿠미대학교 혁신(2018), 청년구국기도회(2021), Billion Soul Harvest(2021), 구국금식기도회(2022) 등을 이루는 과정에서 주님은 승부사 기질을 활용하셨다.

정리=윤중식 종교기획위원 yunj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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